헤르만 헤세 ‘싯다르타’를 무대로 옮겨
메탈과 탈출의 만남…물과 기름의 융화
굉음 속에서 찾아낸 국악의 3분박 그루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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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탈공작소와 밴드 반(baan)이 만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무대에 올린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싯다르타는 오만했다.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믿는 순간부터 그랬다.
“좀 고까운 인물로 느껴졌어요.” 밴드 반(baan)에서 베이스를 치는 김진규(22)는 이렇게 말했다. “깨달음을 얻으려 아내와 자식을 재물처럼 바치잖아요. 누구를 위한 깨달음인가요?”
지난 몇 년 새 난데없이 Z세대의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힙불교’ 트렌드와 ‘텍스트힙’ 열풍에 딱 들어맞았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다.
평균 나이 24.3세. 그야말로 젠지인 밴드 반 역시 최근 이 책을 독파했다. 반과 천하제일탈공작소가 함께 이 소설을 탈춤과 헤비메탈의 언어로 풀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떠나는 싯다르타라는 한 청년이 있다. 잠깐, 불교의 창시자인 그분은 아니다.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명이인인 청년이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지난한 여정을 담은 소설이다.
싯다르타는 정말 깨달았을까.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반의 리더 반재현(27)은 “시나리오를 짜며 원작을 읽는데 초반부의 서술이 고리타분하고 다소 거북해 ‘이게 뭐지?’ 싶었다”고 돌아봤다.
그런데도 왜 ‘싯다르타’였을까. 탈춤을 동시대 언어로 증명해 온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이주원(46) 대표는 “우리는 ‘천탈’, 반은 ‘메탈’, 깨달음의 경지인 ‘해탈’이라는 세 축이 떠올랐다”며 “천탈, 메탈, 해탈로 라임을 맞춘 말장난에서 시작된 주제였다”며 웃었다. 천하제일탈공작소와 밴드 반는 10~11일 양일간 세종문화회관의 컨템포러리 축제 ‘싱크넥스트26’에서 이와 같은 ‘싯다르타’ 무대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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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탈공작소와 밴드 반(BAAN)이 만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무대에 올린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
요동치는 메탈 사운드를 가로지르는 간결한 리프의 멜로디. 반의 ‘히스트리오닉(Histrionic)’이 시작되자, 새하얀 고깔을 쓴 탈꾼들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려 머리부터 어깨까지 쓸어내리듯 툭 떨어뜨린다. 귓전에 울리는 아득한 선율과 기묘하게 익숙한 리듬에 전통의 춤사위가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히스트리오닉’은 동해안 별신굿의 푸너리장단과 같은 리듬이었어요. 반의 음악을 들으며 깜짝 놀란 것은 국악 리듬, 자진모리 굿거리 계통의 삼분박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었어요.”
이주원 대표의 이야기에 반의 리더 반재현은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놀랐다”며 “좋아서 쓰는 리듬이었고, 본능적으로 음악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전통음악 베이스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의 음악은 정박으로 달리는 헤비메탈의 어법에선 비켜 서 있다. 소멸할 것 같은 고요한 침묵 끝에 육중한 비트를 폭발시키고, 그 한가운데로 기타 리프가 낙하한다.
밴드의 음악은 싯다르타의 여정과 닮았다. 한 인간이 성장하고 나아가는 반의 서사는 헤세의 소설과 다르지 않았다. 공연에선 반의 2집 앨범 ‘노이만(neumann, 새로운 사람)’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서사에 힘을 보탰다. 극의 ‘유기적 연결’을 위해 새로 작곡된 ‘강의 테마’와 ‘사랑의 테마’ 등 총 11곡의 사운드가 무대를 채운다.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서 결정적인 순간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듯, 서사를 이어주는 ‘영리한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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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탈공작소의 이주원 대표 [세종문화회관 제공] |
두 팀의 만남이 절묘하다. 동떨어진 두 장르가 경계를 밟고 어우러진다. 둥글게 감기는 탈춤과 메탈의 전형성을 벗어난 반의 음악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이주원은 “반의 음악 위에서 우리가 원래 하던 것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탈은 황해도(봉산·강령 은율탈춤), 서울·경기(경기시나위춤), 경상도(고성·통영오광대) 지역의 정통 춤사위를 음악의 데시벨에 맞춰 유연하게 변형한다. 아버지가 출가를 허락하는 장면에 쓰인 ‘얼리 버드(Early Bird)’가 담아낸 묵직한 심경엔 고성오광대와 강령탈춤이, 부처 장면에선 통영오광대, ‘강의 테마’에선 봉산탈춤이 나온다. 뱃사공과 싯다르타가 함께 추는 장면에선 고성오광대와 덧뵈기춤이 쓰인다.
반재현은 “앨범을 그대로 가져오되 순서조차 바꾸지 않으면 너무 성의가 없을 것 같아 트랙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곡을 넣었다”며 웃었다.
공연에선 탈도 소품이 아니라 서사 구조 자체로 쓰인다. 싯다르타와 관계를 맺는 모든 인물은 탈을 쓰고 등장한다. 탈은 얼굴을 감추는 도구가 아니라, 싯다르타가 사람을 바라보는 편견의 형상이다. 이주원은 “탈을 쓴 인물은 싯다르타에게 단면으로만 각인된 사람들”이라며 “강 위로 탈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싯다르타가 그들을 다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탈춤을 직접 본 일이 없었던 반의 멤버들에겐 이 작업이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경험이었다. 김진규는 “그동안 생각하고 있던 탈춤과는 완전히 달랐다”며 “도리어 무용과 비슷하지 그간 생각했던 탈춤은 탈춤이 아니었던 것 같다”며 감탄했다. 박현민(25)은 “탈은 대체로 비슷하게 생겼는데 그 점이 오히려 ‘똑같은 인간’을 뜻하는 것 같아 좋았다”며 탈의 은유를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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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밴드 반의 반재현 [세종문화회관 제공] |
천탈, 메탈, 해탈의 ‘싯다르타’. 이 셋의 만남은 절묘했다. 천하제일탈공작소의 탈춤과 반이 추구하는 장르 인 메탈, ‘싯다르타’의 서사는 의외의 공통 분모를 가진다.
탈춤은 역사적으로 지배 계급의 위선을 ‘풍자와 해학’으로 무너뜨리는 저항의 춤이었다. 헤비메탈도 다르지 않다. 기성 사회의 억압과 위선을 ‘강렬한 사운드’로 부수는 저항의 음악이다. 헤세의 소설 속 주인공 싯다르타 역시 계급(크샤트리아)과 종교적 권위를 버리고 탈출한 인물이다. ‘기성 세계’를 향한 ‘거부와 해방’의 정서를 이 셋은 공유한다.
이주원은 “타인을 단편적으로만 단정 짓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다”며 “이번 작업은 싯다르타와 나 자신의 ‘싱크(Sync)’가 맞아떨어지는 강렬한 경험”이라고 했다.
첫 장을 열자마자 ‘거북함’이 밀려왔지만, 반재현은 이러한 장치가 “소설이 노린 반작용이었다”고 봤다. 반의 음악이 그렇다. 밴드의 음악은 ‘헤비메탈’로 규정된다. 지난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헤비니스 부문 최우수 음반상을 받았다.
반재현은 그러나 “사실 우린 메탈이나 하드코어라 하기에 애매하다”고 했다. 김진규는 “보통 메탈이라 하면 엄청나게 반항적이고 ‘다 죽어’, ‘헤드뱅잉 해’ 이런 느낌인데 우리 음악은 이모(EMO)라는 장르처럼 더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라고 했다. 그러자 반재현이 다시 말을 이으며 “근데 또 이모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실은 이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결코 전형적이지 않고, 규정되길 거부하는 음악은 자신을 정의하려 하지 않는 멤버들과 똑 닮았다.
“사실 인생이라는 게 단편적인 것은 없잖아요. 화 속에 울분이 있고 기쁨이 있는데 그것이 일차원적으로 드러나는 게 싫었어요.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져야 하는 거죠. 단지 질질 짜거나 화만 내는 것도 싫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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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하제일탈공작소와 밴드 반(baan)이 만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무대에 올린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
반이 소설을 두고 다양한 의견을 내는 것도 이들은 기존의 세계가 규정한 정의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거부해 왔기 때문이다. 반재현은 원작의 모순을 짚었다. 그는 “지혜는 말로 가르칠 수 없다면서 그 지혜를 (소설로) 전달하려는 것이 이 소설의 딜레마”라고 했다. 박현민 역시 “싯다르타가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가 오산”이라며 “방황은 원래 끝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반의 음악에 심어둔 생각들과 다르지 않다. 새사람(노이만)이 됐다고 규정하는 순간 변화는 멈춘다. 그래서 밴드의 앨범은 ‘새사람’으로 시작해 헌사람(Oldman)으로 끝난다.
이들이 정의하는 ‘싯다르타’는 “스스로 떠나온 사람이 남겨진 사람을 떠나보내는 방식을 이해하는 이야기”(이주원)이자 “새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이들은 원작 소설이 지닌 ‘깨달음의 해피엔딩’을 과감히 비튼다. 두 팀이 무대에서 보여주려는 것은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아니다. 흔들리고 의심하며, 자신을 부정하는 그 과정 자체다. 그러다 ‘새 사람’에게 도달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 멤버들은 누구도 ‘새 사람’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걸 모르니 음악을 하는 것”이라며 “(우린) 애초 메시지를 담은 음악을 하지 않는다”며 반재현은 웃는다. 박현민은 “새 사람이 궁금하다면 공연을 보러 오면 된다”고 했다.
이 오래된 서사는 하나둘 해체돼, 폭발하는 굉음과 감성의 선율, 탈춤의 해학을 입는다. 반재현은 “말은 아무리 잘해도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라며 “이 공연은 지금껏 보지 못한 경험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진규 역시 “무대가 전면 노출된 콘서트홀에 가만히 앉아 메탈 사운드를 듣는 경험 자체가 관객에게는 전무후무한 경험일 것”이라며 “몸으로 뛰노는 차원을 넘어, 사운드의 벽을 마주했을 때 관객들이 무서울 정도의 ‘청각적 경외감’을 느낄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 이들이 말하는 ‘깨달음’에 가장 가까운 순간이 있다.
“공연이 끝난 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하는 충격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김진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