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 전력 위해 원전 18기 필요…에너지믹스 대수술하나

‘탈원전’에서 ‘실용주의’로 선회하는 에너지 정책
3대 메카프로젝트에 추가 전력만 24.7GW
12차 전기본에 원전, LNG 비중 높일 듯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업 투자계획 발표 후 손을 잡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배문숙 기자]정부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 피지컬 AI를 축으로 한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국가 에너지·물관리 정책의 대전환이 불가피해지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일반 산업시설과 달리 24시간 중단 없이 대용량 전력과 초순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한다. 순간적인 정전이나 전압 변동만으로도 서버 장애와 반도체 생산 차질이 발생할 수 있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에 따라 정부가 연말 확정하는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서 원전과 액화천연가스(LNG), 재생에너지의 역할을 다시 조정하는 새로운 에너지믹스를 제시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9일 에너지업계와 정부 등에 따르면 12차 전기본에는 3대 메가프로젝트가 촉발한 ‘전력 수요 폭증’을 대거 반영해 원전과 LNG 비중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발표한 메가프로젝트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에는 2035년까지 18.4GW,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에는 6.3GW의 전력이 추가로 필요하다. 두 사업만 합쳐도 24.7GW 규모로, 국내 최신형 원전 APR1400(1.4GW) 약 18기에 해당하는 설비 용량이다. 여기에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기존 국가첨단산업단지의 전력 수요까지 더해지면 장기 전력수요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원자력학회는 최근 정책 제언을 통해 “첨단산업은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확보돼야 계획대로 추진될 수 있다”며 “정부는 제12차 전기본에 신규 원전 확충 방안을 구체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밝혔다.

12차 전기본은 2040년까지의 전력 생산과 공급 계획을 담는다. 총괄위원회는 지난 4월 2040년 최대 전력수요를 131.8~138.2GW로 전망했지만, 이 수치는 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 이전에 산정된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수요 재산정을 거치면서 최대 전력수요가 추가로 상향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태양광 중심의 재생에너지 확대를 중심으로 추진되던 정부의 에너지정책도 실용주의로 대수술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 초기에는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해 ‘부지 확보가 쉽지 않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지만, AI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 육성에 필요한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중요해지면서 기존 원전 건설 계획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추가 활용 가능성까지 검토하는 분위기다.

원전은 발전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거의 배출하지 않으면서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저전원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과 강훈식 대통령 비서실장,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 등도 최근 3대 메가프로젝트와 관련해 원전 활용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다만 원전은 단기간 해법이 되기 어렵다. 국내에서 신규 원전을 건설하려면 부지 선정과 인허가, 건설까지 통상 10~14년이 걸린다. 반면 AI 데이터센터와 용인·서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는 앞으로 10년 안에 대규모 전력 공급이 필요한 만큼 원전만으로는 수요 증가 속도를 맞추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LNG 복합발전이 현실적인 보완책으로 부상하고 있다. 충남 당진시·보령시·태안군 일대에 있는 석탄화력발전소들은 2040년까지 단계적으로 LNG복합발전소로 대체될 예정인데 이들 중 일부를 서남권에 재배치하거나 12차 전기본에 신규 LNG복합발전소를 포함시키는 방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반도체 팹의 조기 착공과 빠른 램프업(양산 물량 확대)을 위해서는 안정적인 전력을 이른 시일 내에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다만 LNG 역시 탄소중립 측면에서는 한계를 안고 있다. LNG 발전은 채굴, 정제, 액화, 수송, 기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를 80배 더 일으키는 메탄을 배출한다. 화력발전에 비해 탄소 배출이 적다는 장점이 있으나 연소 과정에서 초미세먼지를 유발하는 질소산화물(NOx)과 대기오염물질을 배출해 환경단체들은 추가 발전시설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취임전후부터 줄곧 LNG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여왔으나 서남권 반도체 구축사업으로 LNG에 ‘실용주의’로 전환했다는 것이 관가의 시각이다.

실제로 기후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보급을 목표로 내걸었을 뿐, LNG 관련 제도를 만다는 것에는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지난 5월 통과된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AI 데이터센터 특별법’ 논의 과정에서 비수도권 데이터센터가 LNG 전력을 직접 구매할 수 있도록 하는 특례 조항이 검토됐으나, 기후부의 반대에 부딪혀 최종 단계에서 제외된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