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어야 한다


고시생 시절 월드컵은 사탄의 유혹 같았다. 눈은 책을 바라보지만 귀는 고시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TV 중계와 응원 소리를 향했다.

오죽하면 월드컵이 개최되는 해에는 남자 수험생의 합격률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지금 참으면 평생 시원한 맥주 마시며 마음 편하게 월드컵 볼 수 있다는 선배의 조언을 따랐다. 이후 월드컵은 빠지지 않고 관람하고 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세계인의 축제인 동시에 인종차별이라는 오랜 과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 무대다.

프랑스 대표팀의 킬리언 음바페를 향해 파라과이의 한 상원 의원이 쏟아낸 인종차별적 발언은 국제사회의 거센 비판을 불러왔다. 한국인 유튜버를 향한 이른바 ‘눈 찢기’ 제스처와 일본 대표팀을 대상으로 한 동양인 비하행위 역시 스포츠 정신을 훼손한 대표적 사례가 됐다.

인류는 오랜 세월 차별을 제도의 이름으로 합리화해왔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수백년 동안 아프리카인을 인간이 아닌 거래 대상으로 취급했고, 미국의 노예제도는 피부색을 신분으로 만들었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차별은 사라지지 않았다.

189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플레시 대 퍼커슨’ 판결을 통해 “분리하되 평등(Separate but Equal)”이라는 법리를 인정하며, 공공장소에서의 인종분리를 합헌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분리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흑인들이 이용하는 학교와 병원, 교통시설은 백인 시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고, 평등이라는 이름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외피에 불과했다.

역사는 결국 그 오류를 바로 잡았다. 1954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판결에서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평등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기존 법리를 뒤집었다.

헌법이 보호해야 할 평등은 형식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실질적으로 보장해야 함을 명확히 한, 세계 헌법사에서 가장 중요한 판결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피부색과 민족, 출신 국가처럼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요소를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사회적 배제를 정당화하는 것은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이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의 가치를 달리 평가하는 순간, 차별은 피해자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품격을 낮추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들게 된다.

외국의 인종차별에 분노하지만 돌아보면 우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 이주민, 다문화 가정 자녀에 대한 편견이 과거보다는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해소됐다고 보기 어렵다. 같은 영어를 구사함에도 백인 강사를 선호한다거나 길을 묻는 관광객을 피부색에 따라 차별하는 모습들이 아직 우리 공동체 곳곳에 남아 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차별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 사회의 성숙함은 경제 규모나 군사력으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성숙한 시민정신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할 가장 소중한 유산이다.

이찬희 법무법인(유) 율촌 고문 겸 연세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