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베덴 감독과 스메타나 ‘나의 조국’ 연주
“세계 클래식계에 통한 서울 문화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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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향과 츠베덴 음악감독 [서울시향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츠베덴 음악감독의 지명도와 영향력을 빼놓을 수 없지만, 유럽 중심 축제의 문을 연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도 남다르다.” (정재왈 서울시향 대표)
세계 최고 권위의 클래식 음악 축제이자 서구 오케스트라들의 전유물이었던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의 빗장이 아시아, 그것도 한국에 열렸다.
9일 서울시립교향악단에 따르면, 오는 2027년 5월 열리는 제82회 축제의 개막 공연 주인공으로 서울시향이 낙점됐다. 이에 따라 서울시향은 그해 5월 12~13일 이틀간 프라하 시민회관에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을 연주한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에 아시아는 물론 비유럽권 악단이 개막공연에 서는 것은 서울시향이 처음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프라하의 봄’ 개막 공연은 단순한 해외 초청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며 “서울시향이 그동안 꾸준히 쌓아온 네트워크가 하나의 결실을 본 사례이자, 동시에 서울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브랜드가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1946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음악을 통한 상흔 치유를 모토로 출범한 ‘프라하의 봄’ 축제는 세계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각축장이다.
이 축제는 매년 체코의 국민 작곡가인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서거일인 5월 12일부터 시작된다. 개막 공연은 축제의 정체성이자 신성한 정전으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 연주로 포문을 여는 전통을 갖고 있다.
개막 무대는 전통적으로 체코 필하모닉과 프라하 방송 교향악단 등 본토의 상징적 악단들이 도맡아 왔다. 해외 악단 중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로열 콘세르트헤보우(RCO) 등 세계 최정상의 명문 악단과 체코필의 형제 같은 악단인 밤베르크 심포니(야쿠프 흐루샤) 등에 극히 제한적으로 개방해 왔다. 이 80여 년의 철옹성을 아시아의 서울시향이 깨뜨렸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초청은 정재왈 서울시향 대표이사가 지난해부터 현지 집행부와 비밀리에 추진한 ‘밀사 행보’의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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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왈 서울시향 대표 [서울시향 제공] |
정 대표는 8일 오후 기자들과 만나 “유럽에서 역사가 오래된 축제에 서울시향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면 좋겠다 싶었다”며 “츠베덴 음악감독이 객원으로 참가했던 프라하 봄 축제에 우리 악단을 데리고 가면 멋질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처음엔 정 대표의 머릿속 구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그는 “전광석화처럼” 축제 측과 연락을 취해 조율을 시작했다. 정 대표는 “축제 측에 ‘다짜고짜’ 축제 일정을 빼달라 했는데, 2027년 일정을 빼보겠다고 즉답을 줬다”고 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가 서울시향을 초청한 것은 시향을 이끄는 츠베덴 감독의 국제적 인지도와 함께 시향 자체의 위상의 변화가 있어 가능했다.
정 대표는 “서울시향의 초청은 축제에서도 새로운 콘셉트를 잡을 좋은 카드로 판단했던 것 같다”며 “특히나 뉴욕 카네기홀 연주 경험 등 서울시향의 역량과 앨범 활동 등이 두루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오케스트라의 페스티벌’이다. 올해부터 집행부가 달라지며 유럽 중심주의를 벗어나 범세계적인 축제로 확장하려는 시점이다. 그 역사적 물꼬를 서울시향이 튼 것이다.
단원들은 유럽 투어와 축제 초청을 알고 있으나 ‘개막 공연’ 무대에 선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사실 이 축제에서 개막 공연 무대에 선다는 것은 엄청난 상징성이다. 특히 스메타나의 교향시 연작 ‘나의 조국(Má vlast)’ 전곡 연주는 악단에게 영광인 동시에 가혹한 시험대다. 상임지휘자인 얍 판 츠베덴 감독마저 초기에 강한 난색을 보였다는 전언이다. 서울시향 입장에서 지난 2010년 체코 출신의 거장 야쿠프 흐루샤의 지휘로 ‘나의 조국’ 전곡을 무대에 올린 이후 이렇다 할 연주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츠베덴 감독의 대표 레퍼토리도 아닌 데다 서울시향 역시 ‘나의 조국’을 많이 연주하지 않았기에 염려하는 부분도 있었다”며 “체코 국민들 앞에서 이 곡을 연주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축제의 방향성이 세계로 확장한 시점에 서울시향이 연주하는 ‘나의 조국’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허 평론가는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이 체코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지만, 이제는 특정 국가만의 상징을 넘어 세계 여러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고 저마다의 해석을 더하는 국제적인 레퍼토리가 됐다”며 “서울시향 개막 공연 초청은 ‘나의 조국’이 이제 (체코뿐 아니라) 세계 음악계가 함께 이어가는 유산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선택”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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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향과 츠베덴 음악감독 [서울시향 제공] |
이번 쾌거는 일회성 행운이 아니다. 서울시향의 달라진 위상이 맞물린 결과다.
과거 한국 악단들의 해외 투어가 막대한 예산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협찬형 외형 확장’이었다면, ‘프라하의 봄’ 축제는 상당한 수준의 출연료와 현지 체재비 전액을 보장받는 정식 비즈니스 계약으로 성사됐다.
정 대표는 “국내 어느 예술 단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조건을 챙겼으며, 이를 계기로 서울시향의 ‘몸값’은 지속적으로 우상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세계 음악계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우호적인 ‘입소문’도 큰 몫을 했다. 베를린 필이나 빈 필 등에서 활약하는 최정상급 객원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이 서울시향과 협업한 후 그 기량에 감탄해 해외 축제와 기획자들에게 찬사를 전하고 있다.
실제로 정 대표는 “지난해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을 만났을 때, 그가 이미 서울시향의 뛰어난 퍼포먼스를 명확히 꿰고 칭찬을 아끼지 않아 상당히 놀라웠다”며 “체코 측에 이미 서울시향과 한국 음악가들에 대한 정보가 많았고, 여기에 서울시향과 협연한 해외 연주자들의 호평과 얍 판 츠베덴 감독의 지명도 등이 합쳐져 좋은 평가를 얻는 것 같다”고 했다.
단원들 내부에서도 긍정적 변화와 자신감이 쌓이고 있다. 정 대표는 “아시아권의 경계와 한계는 넘어선 것 같다는 자기 확신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국제 무대에서 공인받은 위상은 서울시향의 경영 방식에도 잔잔한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서울시향은 기량적 안정성과 두터워진 관객 수요를 기반으로, 내년부터 기존 2회에 머물던 정기 공연을 일부 프로젝에 한해 3회로 확대한다. 관객들의 수요 유입과 티켓 판매의 안정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모험이다.
다만 기량의 만개와 글로벌 톱클래스 진입이라는 성취 뒤로, 전용 콘서트홀이 없다는 고질적 인프라의 한계도 남아있다. 서울시가 추진 중인 세종문화회관 리빌딩 계획은 여의도 제2세종문화회관 건립 사업의 진척 상황과 연동돼 있다. 정 대표는 “10년 내 완공되지 않을까 싶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 축제’는 서울시향과 한국 오케스트라의 새로운 이정표이자 시험대다. 정 대표는 “축제는 ‘월드컵’과 닮았다. 클래식 음악은 축구처럼 전 세계가 공유하는 ‘공통의 텍스트(레퍼토리)’를 가지고 경쟁한다. 동일한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구현하는가에 따라 그 역량이 적나라하게 비교된다”면서 “축제 개막 공연에서 음악감독의 지향점을 담은 무대를 보여주겠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