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시간의 대서사를 3시간 반으로…‘독일판 토지’ 바그너 ‘링 시리즈’가 온다

초연 150주년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사무엘윤 진두지휘 3시간 25분 압축
8일 예술의전당에서 하이라이트 공연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하이라이트 공연에서 지그프리트를 맡은 테너 김재형,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 브륀힐데 이명주, 공연을 기획하고 알베리히와 하겐 역을 맡은 사무엘 윤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니벨룽의 반지’와 비교할 수 있는 작품은 한국에 ‘토지’밖에 없을 거예요.”

완창에만 무려 15~16시간. 바그너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8월 8일 예술의전당, 14일 부천아트센터)가 3시간 25분 분량으로 상륙했다. 완성까지 장장 28년이 걸린 바그너의 오페라 4부작(‘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그프리트’, ‘신들의 황혼’) ‘링 시리즈’가 밀도 높은 압축 버전으로 한국 관객과 만난다.

기획부터 연출, 출연까지 진두지휘하고 있는 세계적인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니벨룽의 반지’를 축약해 올리는 것은 큰 모험”이라고 했다.

유럽 유수 무대에서 활동했고, 2022년 독일 정부에서 ‘궁중가수(캄머쟁어)’ 칭호를 받은 사무엘 윤은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다. 2012년 바이로이트 바그너 페스티벌에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맡으며 전 세계 무대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이번 무대에서 ‘알베리히’와 ‘하겐’ 역을 맡았다.

사무엘 윤은 “‘니벨룽의 반지’가 전막 초연 150주년을 맞았는데 (국내에서) 이 작품을 공연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가 그 시작을 연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235분의 정교한 축약, ‘바그너 공포증’ 깨는 입문서


장엄한 대서사시 ‘니벨룽의 반지’는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오페라는 라인강의 황금으로 만든 반지를 둘러싸고 난쟁이족과 신, 인간, 거인족의 치열한 싸움과 그들의 사랑, 음모를 그린다.

기획을 겸한 사무엘 윤은 “바그너가 너무도 완벽하게 써낸 15시간짜리 작품을 3시간 30분으로 축약하는 건 모험이었다”며 “유기적으로 잘 흘러가야 하는 스토리텔링이 혹시라도 분리되거나 중요한 인물이 빠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우려도 있었다”며 치열했던 제작 과정을 들려줬다.

사무엘 윤과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이번 공연은 ‘긴 공연 시간’이라는 이 작품의 진입 장벽을 허물고 ‘바그너의 정수’를 만나게 할 마중물이자 입문서다. ‘하이라이트 버전’을 내놓으며 제작진은 유명 곡만 짜깁기를 거부했다.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은 기존의 축약 공연들에 대해 “네 편의 오페라가 가진 독특한 개성을 조화롭게 녹여내기보다 모든 것을 한데 묶어 섞은 짬뽕 같은 작품들을 많이 만나봤다”고 꼬집으며, “우리는 각 작품의 특징을 고스란히 유지한 코스가 4개인 하나의 식사(정찬)를 마련했다”고 차별성을 강조했다.

공연 전과 인터미션엔 친절한 해설 영상 콘텐츠를 제공해 바그너 초심자들의 진입장벽을 낮춘다. 페뤼숑은 “이야기의 시간적 순서와 핵심 장면을 유지하며 관객이 장면 전환을 부자연스럽게 느끼지 않고 하나의 거대한 서사로 이해하도록 했다”고 축약 방향을 들려줬다.

바그너 작품의 핵심 장치인 ‘유도동기’(오페라와 악극에서 특정한 인물, 사물, 개념 등을 나타내기 위해 공통적으로 반복해서 사용되는 주제 선율)를 부각한 것도 이 작품의 특징이다. 사무엘 윤은 “주요 장면을 잘라내고 연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유도동기였다”며 “특정 인물에서 바그너가 사용했던 유도동기를 살려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20분이 넘는 성악가들의 독창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했지만, 지그프리트 사망 이후 나오는 음악을 비롯해 오페라 팬들의 사랑을 받는 아리아는 살렸다.

페뤼숑은 “바그너 음악은 단순한 ‘반주’가 없다. 한 인물이 노래할 때 오케스트레이션 속에는 다른 인물이 존재하며 끊임없는 대화가 이루어진다”며 “풀 오페라 프로덕션에서는 무대 미술이나 규모 때문에 타협하고 포기해야 했던 미시적이고 친밀한 수준의 대화를 이번 콘서트 형식을 통해 완벽하게 짜인 직물로 살려냈다”고 했다. 연주는 페뤼숑이 음악감독으로 있는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맡았다.

테너 김재형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악명 높은 진입장벽, 한국에서 ‘링 시리즈’가 어려운 이유


‘니벨룽의 반지’는 클래식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면서도 실연으로 만나기는 쉽지 않은 까다로운 걸작으로 꼽힌다.

바그너는 전통 가극의 문법인 독립된 ‘아리아’ 형식을 과감히 깨부수고,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음악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무한선율’과 인물·상황을 상징하는 ‘유도동기(라이트 모티프, Leitmotif)’를 도입해 거대한 음악적 우주를 직조했다.

다만 악기와 연주자들에게 이 작품은 잔혹한 장벽이다. 특히나 한국 무대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것은 바그너 작품을 소화할 성악가 라인업을 구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음악계 관계자는 “거대하고 영웅적인 소리를 내는 ‘헬덴테너(Heldentenor)’나 바그너 특유의 ‘금속성(Metallic)’을 지닌 소프라노를 발굴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한다.

심지어 성악가들은 4시간이 넘는 대장정의 끝자락에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뿜어내야 하는 혹독한 체력 소모가 따라온다. 여기에 99인조에 달하는 초대형 오케스트라 편성, 방대한 서사를 완벽히 꿰뚫어야 하는 지휘가 함께해야 한다.

이번 공연은 한국 오페라 공연에 길이 남을 ‘초호화 캐스팅’이 완성됐다. 사무엘 윤은 작품의 핵심인 보탄, 지크프리트, 브륀힐데 등 세 배역을 맡을 성악가들의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작품을 시도할 수 없었다고 강조한다.

사무엘 윤 [아트앤아티스트 제공]


사무엘 윤은 “이 프로젝트에선 가장 중요한 인물인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 보탄을 소화할 성악가가 없으면 할 수가 없었다”며 “보탄 역을 맡은 최인식은 독일 극장에서 같은 역을 했고, 브륀힐데 역의 소프라노 이명주는 금속성의 소리를 갖고 있다. 김재형은 현시점 한국이 낳은 최고의 테너”라고 강조했다.

바그너의 산맥을 오를 성악가들의 다짐도 단단하다. 스스로를 바그너 ‘신생아’로 낮춘 테너 김재형(지크프리트 역)과 소프라노 이명주(브륀힐데 역)는 ‘유치원에 입학하는 심정’으로 무대에 임하고 있다고 했다.

테너 김재형은 연습 과정에서 밀려온 중압감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처음엔 “‘이걸 괜히 한다고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무아지경을 거쳐 오감이 열리는 단계에 이르자 바그너 음악의 진가를 깨달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관객분들도 ‘왜 보러 왔지’라는 생각 대신 마음을 열고 찾아온다면, 음악이 가진 눈부신 순간을 반드시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프라노 이명주 역시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곡을 공부하고 있다”며 “강력함만을 내세우던 기존의 브륀힐데 역에 자신만의 ‘여성성’과 드라마틱한 섬세함을 결합해 차별화된 인물을 녹여내겠다”고 했다.

과감하고 도발적인 모험의 배경엔 국내 클래식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사명감이 자리하고 있다. 사무엘 윤은 “모든 시도엔 비평이 있고 그에 따른 책임이 있다”며 “나 역시 비평과 책임을 동시에 받아들이며 도전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