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P가 안 온다”…국민성장펀드 ‘쏠림’에 소외된 PEF 운용사들

지난 5월 6일 관계자가 서울 여의도 국민성장펀드 사무국 복도를 지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안효정 기자]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 중인 국민성장펀드 출자사업이 국내 모험자본 시장의 돈줄을 묶어버리는 ‘블랙홀’이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예년 같으면 활발히 진행됐어야 할 연기금과 공제회의 출자사업이 국민성장펀드라는 초대형 이벤트 속에 자취를 감췄다는 것이다. 자본시장 일각에서는 “국민성장펀드 리그에 끼지 못한 운용사(GP)들은 펀드레이징 난항이 불가피하다”는 우려가 흘러나온다.

7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최근 자금조달 시장에서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이 체감하는 일반적인 펀드레이징 분위기는 다소 경직돼 있다. 올해 자본시장의 실탄이 국민성장펀드로 몰리면서, 여기에 합류하지 않은 PEF 운용사들이 직면한 조달 환경은 팍팍하다는 지적이다.

한 PEF 운용사 관계자는 “연기금과 공제회의 수시 및 정기 출자사업 제안요청서(RFP)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줄었다”며 “대규모 자금이 움직이는 국민성장펀드의 구체적인 매칭 결과를 먼저 확인한 뒤 움직이는 게 리스크 관리 측면에서 안전하다는 LP들의 계산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또다른 업계 관계자는 “LP들의 출자 결정이 줄줄이 뒤로 밀리면서 올해 안에 펀드 결성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던 GP의 답답함이 커지고 있다”면서 “매칭 자금을 구하지 못해 펀드 결성이 장기화되는 악순환이 현실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정부 주도 정책 사업의 상징성과 신뢰도가 시장 유동성을 선점한 결과다. 주요 기관투자자(LP)들마저 독자적인 출자 사업을 벌이기보다 국민성장펀드의 자금 향방을 이정표 삼아 움직이면서, 이 같은 관망세와 쏠림 현상을 부채질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민간 유동성의 핵심 축인 은행의 자금이 국민성장펀드로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GP들의 고충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여기엔 위험가중치(RWA) 부담 완화 조치가 큰 유인책으로 작용했다. 그동안 은행권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바젤 III 기준상 일반 PEF 출자 시 400%의 높은 위험가중치를 적용 받았으나, 정부가 올해 국민성장펀드에 한해 이를 100%로 낮춰주는 특례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은행권 입장에서는 동일한 자금을 투입하고도 건전성 부담을 4분의 1로 덜 수 있게 된 셈이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은행권의 자금까지 국민성장펀드로 향하면서, 정책 사업에 선정되지 못했거나 아예 지원하지 않은 PEF 운용사들의 입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로 인해 독자적인 투자 색채나 명확한 포트폴리오 전략을 가지고 시장에서 활약하던 우량 운용사들조차 자금 매칭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일시적으로 소외되는 모습이다. 결국 국민성장펀드의 거대한 흐름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LP들의 출자 공백기를 고스란히 버텨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시장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결과적으로 모험자본 시장 전반의 유연성을 떨어뜨리고 투자 생태계의 불균형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IB 업계 관계자는 “정책금융이 시장의 유동성을 공급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다른 핵심 유동성까지 지나치게 흡수하면서 모험자본 시장의 다양성을 훼손할 수 있다”면서 “전체 자금조달 시장에 온기가 돌게 하려면 출자 통로 다변화와 함께 민간 LP들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생태계 역시 복원돼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