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량, 리더십, 친화력으로 악장, 수석 꿰차
국내 악단 성장 맞물려 ‘클래식 허브’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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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에른 방송교행악단의 6년 만의 한국 공연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국의 클래식 음악 지형도가 달라지고 있다. 조성진·임윤찬이란 ‘콩쿠르 스타’들이 등장한 데 이어 전 세계 명문 악단까지 한국인이 장악했다.
2일 음악계에 따르면, 최근 바이올리니스트 지상희(36)가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종신 단원으로 임명됐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지(30)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단원으로 임용, 비올리스트 조소영(28)이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비올라 부수석으로 임용돼 각각 약 1년간의 수습 기간을 거쳐 종신 임용 여부가 결정된다.
현재 한국인 연주자들은 특정 국가를 넘어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전역에서 세계 최고 권위 악단의 주역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K-클래식이 스타급 솔리스트 배출과 동시에 클래식 토양을 떠받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인큐베이터로도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최정상 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엔 2019년 비올리스트 박경민이 한국인 최초로 종신 단원으로 입단했고, 클래식 역사상 가장 보수적인 악단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엔 지난해 9월 한국계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해나 조(한국명 조수진, 31)가 제2바이올린 파트 정식 단원으로 임용됐다. 183년 동안 한국계 단원을 단 한 명도 허용하지 않았던 빈필의 두터운 유리천장이 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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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종신 악장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 [금호문화재단 제공] |
4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는 2018년부터 동양인 최초이자 최연소 여성 종신 악장으로 임명된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윤을 필두로, 바이올리니스트 박규민이 종신 부악장으로 활약 중이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엔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가 2015년 악단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으로 제2바이올린 악장이자, 최초의 ‘여성 악장’으로 임명됐다. 현재는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함부르크 필하모닉은 한국인 연주자들의 밀도가 높다. 한국계 미국인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조가 13년간 공석이었던 제1바이올린 악장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바순 종신 수석 김민주, 트럼펫 종신 수석 이현준, 플루트 종신 수석 유채연 등 8명의 한국 연주자가 관현악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랑스 명문인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악장 박지윤(2018~),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의 이재원(바이올린), 런던심포니의 최초의 더블베이스 종신단원 임채문, 핀란드 방송 교향악단 종신 수석인 오보이스트 함경 등 수없이 많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메닝하우스 헤르만 수석은 헤럴드경제에 “한국엔 1980년대부터 오갔는데 지금은 그때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다”라며 “과거엔 일본 음악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했다면 지금은 한국과 중국, 대만이 이끌고 있다는 점이 큰 변화”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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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보에 연주자 한이제 도이치오퍼 부수석 [본인 제공] |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의 문은 좁고 냉정하지만, 국내 연주자들은 탄탄한 기본기로 입단에 성공하고 있다. 주요 악단은 블라인드 오디션을 통해 국적과 성별, 인종을 배제한 채 오직 소리만으로 지원자를 평가하다보니 한국인에겐 오히려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경우 다니엘 바렌보임이 이끌 당시 ‘바렌보임 라운드’가 따로 존재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아무리 오디션을 잘 봐도 바렌보임의 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탈락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곳에 입단한 이지윤은 바렌보임의 극찬을 받았다. 빈필의 경우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와 빈 필하모닉 단원을 겸임해야 하는 엄격한 이중 단원 체제와 10개월 남짓의 이사회 심사도 진행한다.
특히 오디션 통과 이후엔 6개월~2년에 달하는 수습 기간 연주 능력은 물론 오케스트라 내부에서의 융화력, 다른 악기군과의 앙상블, 밸런스, 성실성 등을 심사받는다. 이후 지휘자와 단원 전체가 참여하는 최종 임용 투표에서 단원의 3분의 2 이상, 보수적인 유럽 오케스트라는 80%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정직원이 된다. 박경민은 이 투표에서 수습 기간을 단축해 독일 최고 악단인 베를린필에 입단했고, 임채문은 파트 단원의 만장일치로 런던심포니에 안착했다.
음악계 관계자는 “한국 연주자를 포함한 아시아 연주자들은 기량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생활에서의 적응력, 친화적 성격도 돋보여 단원들의 지지를 받는 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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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사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한국을 찾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마스트미디어 제공] |
이런 이유로 세계 유수 악단에서 아시아계 연주자가 조금씩 느는 추세다. 미국 오케스트라 협회가 발표한 2015~2025년까지 10개년 인구통계학적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오케스트라 내 아시아계(Asian) 연주자의 비중은 11.6%로, 미국 전체 인구 대비 아시아계(7.0%) 비율보다 높다. 같은 기간 히스패닉이 4.1%, 흑인이 0.3% 등과 비교해도 월등한 수치다.
아시아계 중에서도 한국인 연주자의 성장세는 단연 독보적이다. 실제로 2001년 바이올리니스트 미셸 김이 뉴욕필의 부악장을 맡았고, 플루티스트 손유빈은 2012년 한국인 최초로 뉴욕필 관악 파트 정단원이 됐다. 보스턴심포니오케스트라엔 바이올리니스트 이주람이 최연소 종신 단원으로, 첼리스트 이정현이 50년만의 첫 여성 첼로 단원으로 선발됐다.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에서 최연소 플루트 수석을 지낸 김유빈은 1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수석으로 발탁됐다.
음악계에선 한국인 연주자들이 유수 악단의 선택을 받는 건 ‘교육 시스템’과 ‘육성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본다.
우선 예중, 예고, 대학교로 이어지는 조기 영재 육성 인프라는 연주자들에게 이른 시기부터 전문적 기교 훈련과 오케스트라 교육을 받고 실내악을 배울 수 있게 한다. 이 과정에서 정확한 음정과 리듬, 탄탄한 기본기, 높은 집중력과 자기관리 능력 등이 쌓인다. 부모의 헌신 역시 한몫한다.
덕분에 유학을 가더라도 타국의 학생들보다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평가다. 현재 독일의 한 오케스트라에 몸담은 한국인 연주자는 “기본기와 테크닉 측면에선 워낙 해온 것이 많아 한국 연주자들의 수준이 월등하다”며 “처음 독일에 유학 왔을 땐 손가락이 돌아가지 않는 친구들이 많아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가 테크닉이 그렇게 뛰어난 건가’라는 착각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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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희 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종신 단원 [금호문화재단 제공] |
국내에서 다진 기본기에 유럽, 미국 현지 유학을 통해 깊이 있는 해석이 더해진 것도 한국인 연주자들의 강점이다. 유수 대학과 마스터클래스를 진행하는 세계적인 연주자들은 한국인 학생들의 성실성과 꾸준함이 강점이라고 말한다. 클라리넷 연주자 로망 기요는 “한국 연주자들은 규율이 잘 잡혀 있고 열심히 노력하며 경쟁심이 강하다”며 “무엇보다 가족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음악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음악가로 성공하는 탄탄한 텃밭이 돼준다”고 했다.
기본기와 함께 성실함, 완벽주의적 연주 성향, 배려와 친화력이 더해져 악단에서 한국인 단원을 향한 신뢰가 높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 내 악장과 수석 직책에 한국인들이 임명되고 있는 점은 이들의 리더십 능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악장은 바이올린 실력은 물론 고참 단원들을 아우르고, 매번 달라지는 객원 지휘자들의 독특한 템포를 순간적으로 해석해 현악기 전체에 즉각적으로 지시를 전달해야 하는 ‘외교적 자리’다.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종신 악장인 이지윤은 “당시 오케스트라에 조금씩 세대교체가 일어나는 시기였고, 조금 더 국제적인 면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나왔던 것 같다”며 “신선함이 플러스가 됐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했다. 현재의 그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색을 조율하는 카리스마 악장으로 성장했다. 이지윤은 “워낙 직장(베를린 슈차트카펠레)의 성향이 강하다 보니 자리에 맞춰 단원들과 어우러지는 방법도 달라지게 된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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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베르토 아바도 지휘자와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베르디 ‘레퀴엠’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제공] |
흥미로운 지점은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에서 한국인 연주자들이 존재감을 키우자 해외 음악계의 관심이 한국의 교육 시스템과 오케스트라 환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KNSO아카데미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남미의 젊은 연주자들이 참여해 한국식 오케스트라 교육과 연주 문화를 경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네덜란드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신 시한은 “유럽은 자유로운 해석을 중시하지만 한국 연주자들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정확하다”며 “그 차이를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베네수엘라의 음악교육 시스템 ‘엘 시스테마’ 출신 첼리스트 앤젤 미겔은 “한국에서는 음악뿐 아니라 연습 태도와 질서, 집중력이 하나의 문화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한국으로 향한 이들은 한국 활동 역시 ‘하나의 커리어’로 인식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한국의 오케스트라도 놀랍도록 성장하며 세계적 지휘자들이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정명훈 지휘자의 KBS교향악단, 얍 판 츠베덴 감독이 이끄는 서울시향, 로베르토 아바도 감독의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등을 K-클래식의 3대 축으로서 바라보고 있다. 어느덧 우리가 일방적으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단계를 넘어, 세계와 인재를 교류하는 새로운 국면을 마주한 것이다.
한 오케스트라 관계자는 “이전엔 당연하게 해외 악단을 꿈꿨다면 지난 몇 년 새 국내 오케스트라에 한국인은 물론 아시아, 유럽에서까지 오디션을 보는 경우도 많아졌다”며 “한국 클래식도 서서히 세계로 교육적 교두보를 확장해 가는 단계로 접어드는 시점으로 보인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