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터지며 탄약·보급품 운반나서
6사단 입대…주요 전투서 생사넘겨
‘406고지전’ 총상…총알 아직 몸속에
“더 많은 참전용사 기념관 생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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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5일 서울 마포구 서울복지빌딩 6·25참전유공자 서울시지부에서 만난 유재식 옹이 총상 부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영기 기자 |
“책 한 권 받지 못하고, 학생복 그대로 M1 소총 한 자루 쥐고 나갔지”
76년 전 6·25 전쟁 당시 학도의용군(학도병)으로 나라를 지킨 유재식(94) 옹은 학도병으로 나서던 날을 선명히 기억했다.
유재식 옹은 1950년 전쟁 발발 직후 학도병으로 나섰다가 이어 국군으로 입대했다. 유 옹은 장교 교육을 받고 휴전 이후에도 월남전에 참전한 예비역 대령이다. 현재는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의 지부장을 맡으며 참전유공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지난 2024년 국군의날 행사 카퍼레이드에서는 1호차에 타기도 했던 전쟁 영웅이다.
지난 25일 헤럴드경제는 서울 마포구 서울복지빌딩 6·25 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에서 유재식 선생을 만났다. 베이지색 참전유공자 제복을 갖춰 입고 나타난 그는 머리에 백발이 서리고 허리가 굽었지만 학도병 입대를 결심한 순간을 회상할 때는 눈빛이 반짝였다.
전쟁이 발발한 1950년 유 옹은 강원도 춘천고등학교 5학년 18살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등학교 2학년이다. 그는 “전쟁 발발 직후 우리 학교에서만 24명 정도가 탄약이나 보급품을 3일 내내 운반했다”며 “그전에는 국지전으로 국군이 인민군을 잡은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금방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파죽지세로 남하했던 인민군은 금세 마을을 점령했다. 그는 “인민군을 피해 피란을 갔는데, 인민군 속도가 더 빨라서 피란의 이유가 없었다”며 “다시 마을로 돌아오니 내가 알던 마을이 아니었다. 지주나 이장들에 대한 인민재판을 하는데 끔찍했다”고 했다.
급기야 마을 사람들은 유 옹에게 인민군에 입대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가족들은 아들을 데리고 산속으로 숨어야 했다. 개전 3개월이 흐른 9월 28일 국군이 춘천지역을 되찾고 나서야 산에서 나왔다. 유 옹은 산에서 나오자 곧 학도병에 자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유 옹은 입대 후 북진 하루 전 휴가를 나와 집에 들렀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는 “북진 명령을 받고 하루는 집에 다녀올 수 있게 해줬다”며 “집에 간 날 새벽에 방에서 나와보니 어머니가 정화수를 떠놓고 ‘살아서만 오게 해주십시오’라며 기도를 하더라. 그때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고 눈을 붉혔다.
이후 유 옹은 강원도 화천수력발전소를 되찾는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며 살아남았다. 이듬해에는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돼 강원도 일대에서 소대장과 임시 중대장을 맡으며 전선을 누볐다. 죽을 고비도 있었다. 1953년 7월, 휴전 직전까지 영화 고지전처럼 국군과 인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406고지’ 탈환 작전에서는 총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다.
국군이 고지를 뛰어 올라가야 하는데 인민군의 공격으로 엄두를 못 내는 상황이었다. 상관들은 압박하지만 뛰어드는 이는 없었다. 유 옹은 “이렇게 있어선 부하들이 더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앞장서서 뛰어갔다”며 “고지에서 인민군 1명과 마주 서서 총을 겨누고 쐈다. 둘 다 넘어갔는데, 그 이후 다시 깨어날 때까지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인민군이 유 옹을 향해 쏜 총알은 왼쪽 팔에 맞고 쇄골로 튕겼다. 총알은 다시 휘어 갈비뼈 8개를 부러뜨리고 심장 근처에서 멈췄다고 한다. 총알은 수술 과정에서 적출이 매우 어려웠다. 73년이 지난 지금도 유 옹의 몸속에 있다. 그럼에도 전역하지 않고 근무 적합 판정을 받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23년을 더 군 생활을 하고 1976년 6사단 2연대장을 끝으로 전역했다.
일생을 호국보훈을 위해 헌신한 유 옹은 “우리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 와서 다치고 죽어가며 도와준 사람들한테는 어떤 감사를 해도 모자라지 않다”며 “더 많은 참전용사 기념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영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