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시는 왜 ‘연준의 입’을 닫으려 하나[디브리핑]

의장 취임후 첫 FOMC 주재 매파적 금리동결
연준 운용 제약하는 포워드 가이던스 폐지
성명서 대폭 축소·점도표도 나홀로 거부
소통·대차대조표·물가 체계 전면 재검토
“미래예측 보다 사실전달 초점” 연준 ‘메스’
시장친화적 연준서 물가안정 우선 연준으로

 

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신임 의장이 17일(현지시간) 이틀간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를 마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로이터]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인플레이션은 선택이다.”

케빈 워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첫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가장 강조한 문장은 기준금리도, 경기 전망도 아니었다. 시장에 던진 메시지는 오히려 중앙은행 자체에 관한 것이었다. 연준이 시장을 지나치게 안내해 온 시대를 끝내고 물가 안정이라는 본래 임무에 집중하겠다는 선언이다.

17일(현지시간) 공개된 워시 의장의 첫 FOMC 결과는 기준금리 동결보다 연준의 운영 방식 변화에 더 큰 관심을 모았다. 점도표 제출 거부, 성명서 간소화, 포워드 가이던스 재검토 시사 등은 모두 시장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려는 신호로 해석됐다.

미국 기준금리 추이. [헤럴드경제DB]

워시 의장이 출범시킨 5개 태스크포스(TF)는 그가 구상하는 새 연준의 방향을 보여준다. 소통, 대차대조표, 데이터, 생산성과 고용, 인플레이션 프레임워크를 각각 담당하는 TF에는 연준 내부 인력뿐 아니라 외부 전문가들도 참여한다.

미국 경제매체 CNBC는 이들 TF가 워시 체제의 연준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평가했다.

겉으로 보면 조직 정비 작업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준의 정책 결정 체계를 다시 설계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특히 생산성과 고용, 인플레이션 프레임워크를 별도로 검토하는 것은 인공지능(AI)이 경제 성장과 물가에 미칠 영향을 새롭게 반영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실제 워시는 기자회견에서 AI가 경제 구조를 변화시키고 기존 경제모형의 가정 자체를 흔들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번 FOMC에서는 의사결정 방식의 변화도 드러났다. 과거 연준은 정책회의에서 여러 버전의 성명서를 검토하며 의견을 조율했지만 이번에는 단일 초안만 제시됐다. 워시 의장은 “제안은 하나뿐이었고 위원들은 만장일치로 동의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점도표(dot plot)였다. 점도표는 FOMC 위원들이 예상하는 향후 금리 경로를 보여주는 자료로 시장이 가장 주목하는 연준 문서 중 하나다. 그러나 워시 의장은 이번 점도표에 자신의 전망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는 연준 위원들이 제출하는 금리 전망을 “지우개 달린 연필”에 비유하며, 전망치는 강한 확신에 기반한 게 아니라 여러 시나리오 중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은 경로를 선택한 것에 가깝다고 했다. 그러면서 “연말께 점도표를 포함해 기자회견, 녹취록, 의사록 등 소통 전반에 대한 검토가 있을 것”이라며 말했다.

시장에서는 연준의장의 점도표 제출 거부를 단순한 형식 문제가 아니라 점도표 자체의 영향력을 낮추려는 시도로 해석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연준 의장의 전망이 빠진 만큼 점도표가 시장에 주는 신호도 이전보다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은 워시의 결정이 연준의 시장 소통 방식을 재정비하려는 광범위한 개혁의 일환이라고 분석했다.

금융위기 이후 연준은 점도표와 포워드 가이던스를 통해 향후 정책 방향을 적극적으로 설명해왔다. 시장이 놀라지 않도록 미리 길을 안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워시는 이런 관행이 오히려 시장을 중앙은행 발언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명서 변화도 같은 흐름으로 읽힌다. 이번 FOMC 성명은 과거보다 대폭 짧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성명은 간결함에서 돋보인다”며 “지난 4월의 345단어에서 대폭 줄어든 132단어에 그쳤다”고 했다.

향후 금리 방향을 암시하던 문구도 상당 부분 사라졌다. 워시 의장은 회의록 공개 방식과 기자회견 운영 방식 역시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연준이 시장에 미래 정책 경로를 미리 설명하는 이른바 ‘포워드 가이던스’ 중심 운영에서 점차 벗어날 가능성을 시사한다.

워시는 중앙은행의 역할이 시장을 안심시키거나 자산 가격을 떠받치는 것이 아니라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그가 반복한 “인플레이션은 선택”이라는 표현에도 이런 철학이 담겨 있다. 이는 공급망 충격이나 지정학적 위기 같은 외부 요인보다 중앙은행의 정책 선택을 더 중시하는 시각이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거나 공급망이 흔들릴 수는 있지만 물가가 장기간 높은 수준에 머무는 것은 결국 통화정책의 결과라는 의미다. 워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우리의 우선 목표는 의회가 부여한 임무인 물가 안정을 달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장도 워시의 메시지를 즉각 받아들였다. 정책 발표 직후 2년물 미 국채금리는 16개월 만의 최고치로 상승했다. 달러는 주요 통화 대비 강세를 보였고 뉴욕증시 3대 지수는 일제히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연준이 더 이상 금리 인하를 기본 시나리오로 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실제 이번 점도표에서는 FOMC 위원 9명이 올해 안에 추가 금리 인상이 필요하다고 전망했다. 금리 인하를 예상한 위원은 단 1명에 그쳤다. 직전 회의와 비교하면 연준 내부 기류가 상당히 매파적으로 바뀐 셈이다.

로이터는 연준 위원들이 인플레이션 전망도 상향 조정했다고 전했다. 이란 전쟁 이후 에너지 가격 충격과 견조한 소비, 예상보다 강한 고용시장이 반영된 결과다.

일각에서는 워시가 폴 볼커 전 연준 의장의 철학을 일부 계승하려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

볼커는 1980년대 초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경기 침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고금리 정책을 밀어붙였던 인물이다. 시장 충격보다 물가 안정을 우선시했다는 점에서 워시와 닮은 면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워시의 실험이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연준은 권력이 분산된 조직이다. 이사들은 최대 14년 임기를 보장받고 있으며 지역 연방준비은행 총재들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AI의 생산성 효과나 에너지 가격 상승의 영향 등을 놓고 연준 내부 의견이 엇갈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CNBC는 워시의 실험이 결국 인플레이션 억제 성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가 안정에 성공한다면 연준 개혁도 힘을 받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조용한 연준’ 구상 역시 거센 도전에 직면할 수 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