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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중미 월드컵 개막 경기 무대에 선 블랙핑크 리사 [AEP/연합]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지구촌 최대 축제이자 스포츠 빅 이벤트인 월드컵이 찾아오면 K-팝의 시계는 다르게 움직인다. 아무리 4년에 한 번에 오는 이벤트라지만, 가요계에 미치는 파장은 적잖다. 국가대표팀의 경기 성적과 관심도에 따라 음원 이용량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가요계에선 이에 수개월 전부터 치밀한 셈법을 가동, 컴백 일정을 재편한다.
김진우 써클차트 데이터저널리스트는 “역대 대형 스포츠 이벤트는 대중의 이목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강력한 ‘미디어 블랙홀’이었다”며 “월드컵과 음악시장의 상관관계엔 여러 변수가 작용한다”고 진단했다.
이 기간이 되면 업계에선 “음악의 경쟁자는 음악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은다. 음악은 물론 드라마, 게임, 스포츠 등 전 장르가 소비자의 ‘한정된 시간’과 관심을 두고 제로섬게임을 벌인다.
월드컵 시즌이 되면 대중의 음악 스트리밍 시간이 경기 시청으로 대체된다. 특히 경기 이후 이어지는 거리 응원과 모임,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까지 더해져 일상적 음악 소비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여기에 방송과 포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알고리즘까지 스포츠 이슈에 집중되면서 가요계는 화제성 확보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다. 업계 관계자들이 월드컵 시즌을 ‘피하고 싶은 시기’로 꼽는 이유다.
월드컵이 음악시장에 미치는 파괴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해는 2010년이다.
한국음악콘텐츠협회가 운영하는 써클차트에 따르면, 2010 남아공 월드컵(6월11일~7월11일)의 주요 경기가 있었던 6월 음원 이용량은 전달 대비 23%나 감소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아르헨티나, 그리스와의 주요 경기가 저녁 8시 30분 전후 황금시간대에 열리며 전국적인 거리 응원이 이어졌다.
김진우 데이터저널리스트는 “대중의 시선이 온통 축구로 쏠린 결과, 음악시장은 신곡 공급 감소와 함께 음원 이용량이 급감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음악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16강 진출을 이룬 남아공 월드컵 당시 음원시장이 위축됐다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엔 16강 본선 진출이 좌절, 월드컵 열기도 빠르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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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국 [빅히트뮤직 제공] |
써클차트에 따르면 브라질, 러시아 월드컵 기간 음원 이용량은 전월 대비 단 1~4% 내외의 소폭 하락에 그치며 평년 수준을 유지했다. 김진우 데이터저널리스트는 “대표팀의 성적표가 음악 차트의 회복 탄력성을 결정짓는 핵심 열쇠”라고 했다.
생중계 시차 역시 중요한 물리적 변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는 주요 경기 시간대가 저녁 8시 30분 등 퇴근 이후 모이기 좋은 황금 시간대에 집중돼 K-팝 시장의 타격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반면 브라질 월드컵은 새벽 4시~오전 7시까지 이른 아침에 경기가 집중돼 있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김 데이터저널리스트는 “소비 감소 현상이 극대화되려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처럼 경기 시간대가 ‘저녁이나 밤 시간대’에 배치되어 대규모 거리 응원과 활발한 야간 뒤풀이가 가능한 환경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며 “일상을 마친 후 자유롭게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시간 환경이 조성될 때 비로소 음원 시장을 위축시키는 강력한 변수로 작용하게 된다”고 했다.
월드컵 시기는 대대로 신곡 공급이 줄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무려 35%나 하락했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때는 18%가 줄었다.
신곡 공급이 오히려 증가한 때도 있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당시엔 15%나 신곡이 늘었다.
당시 대형 음원 유통사와 기획사들이 ‘월드컵’이라는 글로벌 이슈가 내수 가요 시장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월드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24 파리 올림픽 기간에도 유사한 흐름이 나타났다. 당시 써클차트 상위권에 진입한 7월 발매 신곡은 15곡에 불과했다. 전년 같은 달에 40곡이 나온 것과 비교하면 크게 줄어든 수치다.
신곡 수혈의 감소는 차트 고착화 현상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경쟁곡이 등장하지 않으니 기존 히트곡들이 장기간 상위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2024년 에스파의 ‘슈퍼노바’가 장기 집권한 것은 공급의 제한으로 시장의 역동성이 떨어진 탓이 컸다. 소비 패턴 역시 정체되는 현상이 빚어지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을 뛰어넘는 ‘이례적 변수’도 존재한다. K-팝 빅스타가 스포츠 이벤트의 중심에 개입될 때다.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이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그해 11월 시작한 ‘겨울 월드컵’이 열릴 당시, 한국의 음원 시장은 좋지 않았다. 10월 말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인한 국가적 애도 분위기와 카타르 월드컵 일정이 겹치며 가요계는 예정된 컴백을 연기하며 보릿고개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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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르티스 [빅히트뮤직 제공] |
써클차트에 따르면 그해 11월 전체 음원 이용량(톱 400 기준)은 전월 대비 3.6%, 전년 같은 기간보다 6.5%나 감소했다. 12월 차트 기준 신규 음원 진입 수 역시 48곡에 머물렀다. 2021년 56곡, 2020년 66곡, 2019년 55곡 등 과거의 연말 성과를 크게 밑돌았다.
시장 전반의 파이는 처참했으나, 월드컵과 빅스타의 만남은 대중의 모든 관심을 독점했다. 당시 방탄소년단 정국이 한국 가수 최초로 월드컵 공식 개막식의 메인 하이라이트 무대에서 선보인 주제가 ‘드리머스(Dreamers)’는 글로벌 메가 히트를 기록했다. 이 곡은 역대 월드컵 공식 사운드트랙 최초 미국 빌보드에서 ‘디지털 송 세일즈’ 차트 1위에 올랐다. 스포티파이에선 한국 가수 솔로곡 최초로 217일 만에 3억 스트리밍을 돌파했다.
흥미로운 지점은 ‘드리머스’가 이 시기 국내 차트에서 역주행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팀이 강호 포르투갈을 꺾고 조별리그를 통과, 16강 진출을 확정하자 ‘드리머스’는 국내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 주간, 일간 차트에서 톱5까지 치고 올랐다. 이 곡은 북중미 월드컵이 시작한 현재 글로벌 음원 플랫폼 아이튠즈 월드와이드 송 차트에도 재진입하며 ‘월드컵 송’으로 소환되고 있다.
올해 북중미 월드컵에선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주인공 ‘루미’ 역의 가창을 맡았던 이재(EJAE)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개막 공연에서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월드컵 주제가 ‘DNA’를 불렀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또 다른 개막 경기에선 블랙핑크 리사가 지난달 발표한 월드컵 사운드트랙 ‘골스’(GOALS)를 불렀다. 현재 차트 상에선 의미있는 변화를 일으키진 않고 있다.
방탄소년단은 다음 달 19일 미국 뉴저지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월드컵 결승전 하프타임쇼 무대에 헤드라이너(간판출연자)로 출연한다. 이 무대에는 세계적인 팝스타 마돈나, 샤키라가 함께 하는 만큼 다시 한번 이슈 독점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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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개막 공연에서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와 월드컵 주제가 ‘DNA’를 부른 이재 [로이터/연합] |
북중미 월드컵이 시작한 현재 가요계에선 이전 월드컵과 비슷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올봄 그룹들의 컴백이 유독 집중됐다. 베이비몬스터와 엔믹스, 있지를 비롯해 르세라핌과 에스파, 아이오아이 등 대형 그룹들이 지난달 잇따라 활동에 나섰다.
물론 5월 컴백의 배경엔 월드컵뿐 아니라 대학 축제 시즌이라는 변수도 작용했다. 다만 업계에선 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열리는 기간을 피해 프로모션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전략에 따라 컴백을 서두른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월드컵 개막 이후 K-팝 업계가 다소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이에 차트 고착화 현상이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 현재 멜론 톱100 차트에선 5월 말 컴백한 아이오아이의 ‘갑자기’가 1위를 지키고 있고, 5월 4일 발매한 코르티스의 ‘그린그린’이 2위에 머물고 있다.
북중미 월드컵에서 한국 시간 기준 대표팀의 경기는 체코전의 경우 지난 12일 오전 11시, 멕시코전은 19일 오전 10시, 남아공전은 25일 오전 10시로 예정돼 있다.
김 데이터저널리스트는 “경기 시간대가 평일 오전이라 음악 소비에 필요한 물리적 시간 부족 현상은 거의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면서도 “이번 대회가 음원 시장에 미칠 파급력의 최대 관건은 국가대표팀의 경기 성적이다. 토너먼트 진출 여부가 이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미 주요 그룹이 5월부터 월드컵 직전까지 컴백을 완료한 상황에서 월드컵 기간 컴백하는 그룹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었다. 개막 이후 국내에 컴백하는 가수는 7팀뿐이다. 지난 15일 라이즈, 17일 걸그룹 유스피어, 온앤오프가 컴백을 마쳤고, 22일 하츠투하츠, 26일 에이티즈, 29일 V8(세븐틴 버논 디에잇)이 컴백을 앞두고 있다.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올해 월드컵엔 축구 중계로 인한 음악 방송 결방 등의 타격이 없고 신인그룹의 팬층은 축구 소비층과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대형 아이돌 역시 내수 차트보다 글로벌 투어 지표를 더 중시하기에 비교적 스포츠 이슈에서 자유로운 편”이라며 “다만 국내 화제성 선점이 절실한 대다수의 기획사는 이번 월드컵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우회하는 보수적인 전략을 택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