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이면 국악관현악 작곡 뚝딱…“AI 작곡가, 내 사수 같았다”

‘공존’ 연습 현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포디움에 선 정예지 지휘자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 이어폰을 꽂았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악단의 연주를 듣고 소리를 분별해야 할 지휘자의 귀에 이어폰이라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서양의 오케스트라처럼 대규모의 악단 형태로 조직한 국악관현악단의 유려한 연주가 시작됐다. 기존의 국악관현악과는 달랐다. 매끄럽게 흐르는 대금, 소금 선율에 리듬을 얹은 현악은 SNS 속 BGM 같기도, 드라마 OST 같기도 하다. 그 위로 티 없이 맑은 여성 보컬리스트가 위로의 노랫말로 속삭인다. AI 지음이 작곡하고, 김백찬이 편곡한 ‘그대라는 기적’.

정예지 작곡가는 “미리 녹음된 AI 보컬의 노래에 맞춰 국악관현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것이다 보니, 박자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메트로놈 소리를 들으며 리허설했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론 성악가가 지휘자에게 따라오지만, 이 경우는 완전히 반대예요. 마치 춤을 추는 기분이에요. (웃음)”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오는 26일 달오름극장에서 인문학콘서트 ‘공존’을 선보인다. AI 생성 음악 스타트업 포자랩스와 공동 제작한 이번 공연은 AI가 관객 설문 데이터를 분석해 작곡한 음악을 인간 편곡자와 연주자가 완성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지음과 함께 무대 위 진행자로 참여한다.

채치성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겸 단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공연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온 AI가 예술 영역에서도 역할이 커지고 있어, 어떻게 해야 AI와 공존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공연에서 AI 작곡가 지음은 “관객의 정서를 공감하는 도구이자 지기였다. 지음 역시 자신을 직접 ”국립국악관현악단의 AI 동료“라고 소개했다.

AI 작곡가 지음과 포자랩스 손영웅 이사 [국립국악관현악단 제공]


이 곡은 관객 사전 설문을 통해 만들어졌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관객들에게 요즘 느끼는 감정, 일상에서 선호하는 음악 장르와 빠르기, ‘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이 데이터를 분석해 지음이 작곡 초안을 생성하고, 키워드·템포·분위기·음계 같은 음악적 정보를 추출해 인간 편곡자에게 넘겼다.

지음은 이 곡에 대해 “ ‘오늘도 괜찮았다, 조금만 더 가보자 같은 아주 작고 다정한 희망’ 등 관객분들이 건네준 말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위로가 되는 곡”이라고 했다.

이번 무대에서 지음은 5곡의 레파토리를 들려준다. 관객 설문 데이터에서 출발한 ‘데이터의 발아’, 아리랑을 AI 관점에서 재해석, 구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의 흐름을 엮은 ‘알고리즘 아리랑’,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을 AI 보컬로 담아낸 ‘그대라는 기적’, 팝의 선율과 자진모리 장단을 결합한 ‘경계의 확장’, 가야금, 대금, 해금의 따뜻한 음색으로 작고 다정한 희망을 전하는 피날레 곡 ‘공존의 울림’이 그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기술 파트너인 생성형 AI 음악 스타트업 포자랩스의 손영웅 이사는 “이번 작업은 단순히 AI가 음악을 만드는 실험이 아니라, 인간과 AI가 어떻게 함께 창작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지음이 곡 초안을 생성하는 데는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포자랩스 내부 프로듀서의 고도화 과정까지 포함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건네받아 국악관현악 편곡으로 완성하는 데 김백찬 작곡가가 쏟은 시간도 일주일에서 열흘 남짓이었다. 그는 ‘그대라는 기적’을 편곡했다. 김 작곡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이것만 했다면 3일 안에 끝났을 것”이라고 했다.

‘공존’ 연습 현장 [국립국악관현악단 제공]


이번 작업의 성격은 통상적인 편곡과 달랐다. 악보가 아닌 음원으로 받았기에, 일일이 지음이 만든 음원을 악보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지음의 원곡을 악기별 멀티트랙으로 분리, 국악기로 표현하기 어색한 부분을 걷어냈다. 화성이 너무 꽉 차 있는 구간은 성부를 빼 국악관현악이 채울 자리를 만들었다.

김 작곡가는 “대학 졸업 후 녹음실 어시스턴트로 들어가 사수의 곡을 받아 악보를 따고 코드를 정리하던 시절이 떠올랐다”고 고백했다. AI 지음이 그의 사수 같았다는 것이다.

다만 ‘편곡 과정’은 덜어내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AI 작곡가는 음악에 여백을 두지 않아 꽉꽉 채웠다. 김 작곡가는 “같은 코드 패턴이 반복되는데 아주 미세한 차이로 코드가 달라진다”며 “음 하나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그런 것들이 정돈되지 못한 느낌을 줬다”고 했다. 게다가 AI가 만든 음악의 독특한 청각적 특징을 안고 있었다.

그는 “AI가 구사한 보컬의 그루브나 애드리브는 인간의 기준에서 볼 때 다소 과한 측면이 있었다”며 “대선율이나 화성을 채우는 디테일은 좋았으나, 같은 코드 패턴이 뒤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등 정돈되지 못한 미흡함도 공존했다”고 평가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은 AI 작곡으로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국악 데이터’의 공백을 확인했다. “AI에게 국악을 만들어 달라고 하면, 현재 기준으로 생성 결과물의 95% 이상이 중국 악기나 일본 악기를 사용한다”고 김 작곡가는 지적했다. 가야금이라고 명시해도 일본 전통 현악기인 고토(琴)의 음색으로 들릴 수 있다. AI가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직접 개입하기도 어렵다.

김 작곡가는 “서양 음악 어법에 익숙한 AI가 국악기를 표현할 때 중국이나 일본 악기 샘플을 쓰는 건, 샘플화된 가상 악기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악기 샘플이 없지는 않지만, 음악을 자연스럽게 구현해낼 수 있는 수준의 데이터가 부족하다. AI가 학습할 국악 음원 자체가 적은 것이다.

손영웅 이사는 “AI 생성 기술이 기본적으로 서양 음악 어법에 기반하고 있어, 단기간에 대량의 국악 데이터를 학습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며, “자문을 통해 서양 어법 안에서 국악적 5음계나 스케일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유도했다”고 부연했다.

공연에서 선보이는 다섯 곡은 각기 다른 인간과 AI 협업 비율로 완성됐다. 세 번째 곡 ‘그대라는 기적’은 AI의 음악적 의도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편곡됐고, 두 번째 ‘알고리즘 아리랑’은 편곡자의 의도가 더 많이 반영된 방향으로 재창조됐다. AI의 초안에서 얼마나 멀어지느냐에 따라, 공존의 형태도 달라진다.

김 작곡가는 “인간이 만들든 AI가 만들든, 이 음악이 굉장히 완성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했다”며 “AI와 인간이 함께 발전하면 좋은 음악으로서의 가치와 퀄리티는 훨씬 높아질 것”이라고 했다. 지음은 “악보에 담기 어려운 미세한 떨림이나 호흡, 사람만 할 수 있는 거라는 걸 이번에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