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엄벌주의가 교실을 비정한 ‘생존 게임’으로 밀어 넣었다. 사소한 다툼도 무조건 학폭위로 던져지면서 심의는 폭증했지만 정작 ‘학교폭력 아님’ 처분만 쏟아지며 교실의 자정 기능은 마비됐다. 입시 감점을 피하려는 어른들의 소송 대리전 속에서 아이들은 사과와 화해 대신 약점을 수집했다. 피해자 보호라는 본질을 잃고 사법화의 늪에 빠진 학폭 제도의 구조적 모순을 학부모·변호사·교사·학생 4개의 엇갈린 시각으로 입체적으로 해부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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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동학대 신고 위험에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교사의 모습. [챗GPT로 제작] |
[헤럴드경제=김용재 기자] “선생님이 뭔데 우리 애가 잘못했다고 판단하시나요? 이거 아동학대로 신고하겠습니다.”
학교폭력 전담교사를 8년째 하고 있는 초등교사 정모씨는 학교폭력 사안이 발생했을 때 교사들이 가장 자주 듣는 말로 ‘아동학대 신고’를 꼽았다. 학생 간 갈등이 발생하면 담임교사가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화해를 유도하던 과거와 달리 2026년 교실의 풍경은 달라졌다.
어느 한쪽 진술에 무게를 두는 순간 악성 민원이나 아동학대 신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교사들을 짓누르고 있다. 학부모들은 학폭 신고 후 학교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현장 교사들의 이야기는 정반대다. 신고가 접수되는 순간 교사는 갈등 해결의 주체가 아니라 절차 수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정씨는 “교사가 자체적으로 중재하려 하면 모든 책임을 떠안아야 하지만 학폭위 절차를 밟으면 적어도 규정대로 처리했다는 방어막이 생긴다”며 “학폭 신고가 교사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물러서게 만드는 구조”라고 말했다.
교사들이 책임 부담을 피하기 위해 교육적 중재보다 절차 처리에 의존하는 현상이 커지고 있다. 학폭 신고가 접수되면 교사들에게는 또 다른 부담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한 17년차 초등교사 김씨는 “가해 학생 학부모가 찾아와 멱살을 잡거나 강압 조사를 운운하며 언론 제보로 협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학폭은 수당을 두 배로 줘도 모두가 기피하는 1순위 업무”라고 토로했다.
기계적인 절차 이행은 교사들의 ‘행정의 늪’에서 비롯됐다. 학교폭력심의위원회가 열리기 위해선 사안 접수부터 48시간 내 초기 보고, 사실관계 확인과 증빙자료 확보, 교육청 보고까지 수십가지 서류 작업이 이어진다.
김씨는 “학폭위 서류를 위해서는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적어야 한다”며 “새벽까지 조서 형태의 서류를 작성하다 보면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인지 수사관인지 헷갈릴 지경”이라며 웃었다.
현장 교사들은 현재 구조가 학생들에게도 잘못된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우려한다. 학생 간 갈등이 발생했을 때 대화와 중재, 사과를 통해 해결하는 경험보다 신고와 증거 수집이 우선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사들은 사소한 언쟁이나 장난 수준의 갈등도 학부모 요구에 따라 학교폭력 절차로 접수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학폭위에 회부됐으나 최종적으로 ‘학교폭력 아님’ 조치 결정을 받은 건수는 2021년 1669건에서 2024년 5246건으로 3배 이상 폭증했다. 유의미한 폭력이 아닌 사소한 언쟁이나 장난마저 무분별하게 공식 절차로 쏟아졌고 교사들의 행정력은 낭비되고 있는 셈다.
학폭업무를 맡았던 박정우 교사는 “옆자리 학생이 수업 중 큰 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학폭 신고를 요구하는 사례도 있었다”며 “예전 같으면 담임이 지도하고 끝났을 일들이 이제는 모두 공식 절차로 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폭 신고가 늘어날수록 교사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학부모들의 기대와 달리 현장에서는 모순이 벌어지고 있다. 교사는 민원을 피하기 위해 학폭위라는 절차를 선택하고 학생들은 관계회복이나 대화보다 신고를 먼저 배우게 되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