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선발된 박초록·김단주·이지용
“앙상블? 의미 없는 순간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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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뮤지컬단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이지용, 박초록, 김단주 (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야생의 기운’이 솟구친다. 쿵쾅거리는 타악, 활기찬 건반 선율에 맞춰 12명의 고대 부족원의 얼굴이 만화처럼 튀어 오른다. 현대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가 다채로운 표정으로 채색된다. 뮤지컬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진짜 지배자’.
‘더 트라이브’는 ‘거짓말을 하면 고대 부족이 나타난다’는 이상하고 기이한 어른 동화다. 서울시뮤지컬단이 2024년 처음 올린 이 작품은 소극장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중극장 M씨어터로 극장을 옮기며 전면 ‘재정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뮤지컬단 역사상 처음으로 ‘공개 오디션’을 통해 앙상블 배우를 선발했다. 무려 460여명이 몰린 오디션에서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김단주(36), 이지용(32), 박초록(27)이 뽑혔다. 초연 때는 담아내지 못했던 고대 부족 세계관을 완성하는 ‘제3의 주인공’이다.
개막을 앞두고 분주한 가운데 최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세 배우는 “가식을 벗어던지고 날것의 진짜 우리를 꺼내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무용가, 퍼펫티어, 대학로 주·조연으로 활약한 이들의 공통분모는 ‘뮤지컬’. 소극장부터 대극장까지 종횡무진하던 세 사람에게 국내 유일의 국공립 뮤지컬 단체인 서울시뮤지컬단은 ‘미지의 세계’였다.
“밖에서 볼 땐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일종의 ‘로열(귀족)’ 단체나 대기업 같았어요.” (김단주)
청년 배우들에게 50~60명의 단원이 정년을 보장받는 이곳은 ‘꿈의 직장’이자 ‘호기심 어린 대상’이었다. 산업화한 뮤지컬 환경 안에서 엄청난 제작비로 물량 공세를 하는 민간 제작사들의 작품과 달리, 서울시뮤지컬단의 방향은 다른 곳에 향한다. 공공단체라는 사명을 업고 민간에선 하지 못하는 다채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
박초록은 “라이선스 공연처럼 ‘장사’를 하기보다, 짧고 굵게 예술적이고 도전적인 창작 시도를 하는 곳이라 늘 궁금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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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뮤지컬단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김단주 [세종문화회관 제공] |
서울시뮤지컬단을 향한 ‘궁금증’은 세 배우가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기꺼이 도전장을 낸 이유다. 세 사람의 이력이 만만치 않다. 김단주는 뮤지컬 ‘물랑루즈’(2023년 초연)로 눈도장을 찍었고, 이지용은 최근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퍼펫티어로 활약했다. 박초록은 뮤지컬 ‘앤’의 주연을 맡으며 대학로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해왔다.
세 사람은 “초연을 보진 못했지만 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고, 대기업 같은 이곳에 와서 함께 호흡을 맞춰보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지용은 특히 “사실 고대 부족이라고 해서 원시인을 생각했다”며 “주변에서 부족을 뽑는다니까 ‘너 아니면 누가 하냐’고 가보라 했다” 웃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지용은 “국공립 단체이기에 밖에서 작업하는 환경보다 안정적이고 앙상블 배우의 경우 페이도 좋다”며 “이곳에서 공연하면 ‘굶진 않겠다’ 싶었다”고 했다. 박초록 역시 “안정적인 공간 안에서 작품을 하는 배우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작업을 하는지 궁금증이 컸다”며 눈을 반짝였다.
오디션 합격과 동시에 마주한 국공립 단체의 환경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주 52시간 근무는커녕, 밤낮은 물론 주말도 없이 매진하던 민간 제작사의 환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세 사람은 “‘10시 출근, 5시 퇴근, 점심시간 1시간 반’이라는 명확한 칼퇴근 시스템이 보장됐다”며 “제일 적응이 안 되는 부분”이라며 웃었다. 심지어 지난 3일 지방선거일엔 “투표하고 오후 1시까지 출근하라”는 공공기관다운 배려도 있었다. 박초록은 “규칙적인 패턴의 연습은 처음이라 체력 관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쯤 하면 ‘오디션 장인들’이다. 괜히 5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 아니다. 오디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세 배우는 저마다의 ‘필살기’를 준비했다.
오디션 당일 박초록의 하루는 분주했다. 일찌감치 다른 공연을 소화한 뒤 부랴부랴 오디션 현장으로 넘어갔다. 기다란 속눈썹과 화려한 섀도는 무대에 올랐던 모습 그대로였다. 의상만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장한 ‘강심장’이다. 여성 앙상블 배우에게 주어진 사전 대사지를 마주한 그는 강단 있게 덤볐다. 애초 등장인물 4명의 대사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으나, 박초록은 “심심하게 한 명만 할 바엔 네 명 다 해버리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1인 4역’의 원맨쇼에 창작진도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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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뮤지컬단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이지용 [세종문화회관 제공] |
김단주의 필살기는 ‘철저한 준비성’이다. ‘물랑루즈’ 오디션 당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화의 실사판’으로 꾸며 맛본 ‘성공의 경험’이 그의 오디션 인생의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지나친 치장은 ‘과유불급’. 이번 작품에선 ‘백지상태’의 김단주를 보여줬다. 물론 “오디션 전날까지도 쿠팡으로 부족처럼 보일 깃털을 살지 말지 내내 고심했다”고 한다. 그의 선택은 “부족 한 스푼에 제격인 호피무늬 셔츠”. 대신 소품 준비는 철저했다. 주어진 대사에 맞춰 ‘포스터’까지 제작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준비해 온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어요. 남성 지원자들을 쭈욱 보니, 실력파 몇 명 뽑히고 준비성 부분에선 내가 되겠다 싶었는데 이게 웬걸 더 한 사람이 있더라고요.” (김단주)
그 사람이 바로 이지용이었다. 그는 대사 속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티셔츠, 양말, 엽서)을 자체 제작한 것도 모자라, DIY 키링 10개를 쿠팡으로 주문해 자기 얼굴을 넣어 심사위원들에게 돌렸다. 연기 도중 겉옷을 훌렁 벗으며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보여주는 파격 퍼포먼스까지 등장하니, 오디션장에서도 박장대소가 나왔다.
이지용은 “오디션 끝나고 음악감독님께 키링을 드렸는데, 그날 저녁 ‘라이프 오브 파이’ 로비에서 감독님을 딱 마주쳤다”며 “감독님이 주머니에서 키링을 쓱 꺼내 보여주시는데 소름이 돋았다”며 웃었다. 이지용 얼굴이 담긴 키링은 지금도 서울시뮤지컬단 연습실 벽에 당당히 걸려 있다.
출신도, 나이도 제각각. 심지어 이 작품을 통해 생전 처음 만났지만 세 사람은 어느새 연습실에서 끈끈한 유대를 쌓았다. 서로를 향한 리스펙트엔 가식이 없다.
박초록의 탄탄한 보컬 실력은 모두를 홀렸다. 김단주는 “런스루를 돌다 보면 어떤 구석에서 목소리가 엄청나게 뚫고 나오는 게 느껴진다”며 “단순히 큰 게 아니라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소리였는데, 그게 다 초록이었다”고 했다. 이지용 역시 박초록의 탄탄한 실력을 극찬했다. “벌써 노래를 저렇게 잘해대면 나중엔 어쩌려고 그러나 싶을 정도로 부러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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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뮤지컬단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박초록 [세종문화회관 제공] |
박초록과 김단주는 ‘인간 이지용’의 ‘투명한 진실함’을 최고의 강점으로 꼽았다. 박초록은 “지용 오빠는 속이 너무 투명해서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인간 이지용의 좋은 면모가 무대 위 신체 연기에도 그대로 묻어난다”고 칭찬했다. 김단주 역시 “연습실에서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100% 던져 과감하게 연기하는 태도를 본받고 싶다”고 했다.
두 사람의 칭찬에 이지용은 폭탄 발언(?)으로 화답했다. “오디션 붙고 단주 형 인스타그램을 찾아봤는데 ‘젠더리스 이미지’가 강렬해서 기가 확 빨렸어요. ‘저 형이랑 못 어울리겠다’ 싶었는데, 만나보니 완전 제 과더라고요. 겉만 화려하지 속은 완전 시골 촌뜨기요! (웃음) 너무 웃기고 다정해요.” 박초록 역시 “무대 아래에서는 순두부처럼 보들보들한데 무대 위에선 타고난 유머러스한 재능으로 완전히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했다. 김단주는 수줍게 웃으며 “사실 MBTI가 ‘INFJ’라 엄청 소심하다. 어릴 땐 전화로 짜장면 주문도 못 해서 울었던 사람”이라고 말해 두 사람을 놀라게 했다.
‘더 트라이브’의 앙상블은 대극장 뮤지컬 속 앙상블과는 다르다. 부족은 주인공들의 내면을 대변하고 극의 ‘텐션’을 끌어올린다. 부족의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전면 개작’에 가까운 수준으로 넘버(뮤지컬 음악)가 다시 쓰였고, 퍼포먼스도 강화됐다.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 단장은 이들을 ‘제3의 주인공’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뮤지컬과 달리, ‘더 트라이브’에선 앙상블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단순한 ‘그림’이나 ‘배경’으로 쓰이는 순간이 단 1초도 없어요. 12명의 부족원 모두가 무대에 존재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고, 각자의 책임감을 가져요. 의미 없는 순간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차별점이에요.” (김단주)
앙상블 배우들은 모두 부족원으로 각자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박초록은 ‘끼야초’, 김단주는 ‘샤사’, 이지용은 ‘피핀’이다. 부족이면서 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일 때의 “캐릭터와 에너지 상태가 어느 정도 맞닿았으면 좋겠다”는 표상아 연출가의 의견을 고려해 머리를 싸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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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뮤지컬단 ‘더 트라이브’ 오디션에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이지용, 박초록, 김단주 (왼쪽부터) [세종문화회관 제공] |
1인 2역은 기본, 배우들의 체력 소모도 엄청나다. 오프닝 넘버부터 피날레까지 퇴장 없이 풀파워로 구르고 소리쳐야 한다. 박초록은 부족원 역할 외에도 ‘천방지축 초등학생’, 이지용은 PD, 김단주는 박물관 직원 역할을 소화하느라 동선과 의상 퀵체인지 계산에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김단주는 “배우들이 힘들어야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며 “연습실에선 체력적 한계가 오지만, 극장에서 밴드 세션의 타악기 라이브 연주와 마이크 소리가 합쳐지면 엄청난 에너지가 나올 것”이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세 배우와 함께 ‘더 트라이브’는 재기발랄한 역동성을 입었다. ‘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12명은 앙상블로 하나가 되면서도 제각각의 에너지로 ‘나만의 개성’까지 보여준다. 나름의 전략도 있다. 박초록과 이지용은 ‘존재 자체’를 내세운다. 박초록은 “12명 중 가장 키가 작아 굳이 눈에 띄려 애쓰지 않아도 보인다“며 웃었고, 이지용은 “뽀글뽀글 부풀어 오른 머리모양 때문에 눈에 띌 것”이라고 했다. 김단주는 첫 넘버부터 ‘단독 솔로’ 파트가 준비돼 있다. 10초 남짓이지만 그는 “1분 같은 10초를 쓰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압도적으로 보여주되, 나만 잘났다며 드러내고 싶진 않다”는 김단주는 “다들 날 둘러싸고 있으니 그 기운을 받아서 전달하는 느낌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제3의 주인공이지만, 정작 세 배우들은 ‘관전 포인트’로는 다른 곳에 공을 돌렸다. 이지용은 주연 배우들의 압도적 실력, 김단주는 피아노, 타악기 등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풍부한 음악을 꼽았다. 박초록은 “더블 캐스팅된 주역(김찬호 허도영, 유주혜, 이혜란)들의 결이 극명하게 달라 재미가 두 배”라고 했다.
몸이 부서져라 연습에 매진 중인 지금, 세 사람이 이 무대를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닮았다. 진짜 ‘나다움’을 찾는 용기다. 이지용은 “인스타그램 속 세상처럼 현대인들은 잘사는 척, 바쁜 척 거짓말을 많이 하는데, 이 공연을 보면 굳이 거짓말하지 않아도 나답게 잘 살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을 것”이라고 했다. 박초록도 “현실에 찔려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결국 솔직해져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아 가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단주는 공연의 키워드를 ‘러브 마이셀프(Love myself)’로 봤다.
”내가 나를 사랑해야 스스로도 뭘 원하는지 물어볼 수 있잖아요.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이 봐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봐도 공연을 보고 돌아갈 땐 자신에게 더 확신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다른 누구와의 사랑이 아닌 나 자신과의 사랑, 그걸 들려주는 이야기에요.” (김단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