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서 ‘역할론’ 확인한 中 “휴전 약속 지켜야” 훈수 두며 트럼프 비판 한 방 추가

왕이 “일방 군사행동 용납 못 해, 유엔 약화 아닌 강화돼야”
中, 美 우회 견제하며 이란戰 중재역 자처
글로벌 무대서 존재감 과시하며
호르무즈 안정·유가 관리 등 실리도 챙기려는 전략


26일(현지시간)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고 있다. [AP]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중국이 미국과 이란 양측에 휴전 약속 준수와 대화·협상을 촉구하며 중동 문제에서 중재자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동시에 유엔 무대에서는 미국의 대(對)이란 군사행동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유엔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견제 수위도 끌어올리는 모습이다.

26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외교부장 겸임)은 이날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자신이 주재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서 “안보리 권한을 우회하는 어떠한 일방적 군사행동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왕 주임은 유엔 헌장과 국제 평화·안보를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유엔은 전후 국제질서의 중심축”이라며 “유엔의 역할은 약화가 아니라 강화돼야 하고, 그 위상은 대체가 아니라 수호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회원국들은 실질적 행동으로 재정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블룸버그는 왕 주임의 발언이 미국의 대이란 군사행동과 트럼프 행정부의 유엔 정책을 겨냥한 사실상의 비판이라고 해석했다.

왕 주임의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진 지 2주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나왔다. 당시 시 주석은 대만 문제와 이란 전쟁 외교 해법 등을 놓고 미국 측에 강경한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왕 주임은 미국의 유엔 분담금 미납과 국제기구 탈퇴 움직임도 정면으로 겨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 기구 자금 지원 축소와 함께 별도 국제협의체인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 구상을 추진해왔다. 해당 구상은 가자지구 외교 해법 논의 과정에서 유엔 안보리 지지를 얻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기존 유엔 체제를 대체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논란이 커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미국은 현재 약 20억달러(약 3조원) 규모 유엔 분담금을 미납한 상태다. 트럼프 행정부는 올해 들어 31개 유엔 산하기구와 35개 국제기구에서도 탈퇴했다.

미국은 그동안 유엔이 기후변화와 성평등 등 의제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중국은 전후 국제질서의 중심에 유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국이 국제질서를 재편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중동 문제에서 ‘중재자 이미지’ 구축에도 속도를 내면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여러모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다.

중국 외교부의 마오닝 대변인은 27일 정례브리핑에서 “관련 당사자들이 휴전 약속을 준수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분쟁을 해결하길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모든 당사자의 정당한 우려를 수용하는 해결책을 계속 모색해 중동 및 걸프 지역에 조속히 평화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발언은 미국 중부사령부가 전날 이란 남부 지역에서 “자위적 성격의 공격”을 실시했다고 밝힌 직후 나왔다. 중국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이란 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 필요성도 재차 강조했다.

마오닝 대변인은 “중국은 언제나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이란 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해왔다”고 말했다. 이어 “관련 당사자들이 이번 기회를 활용해 협상을 통해 모든 당사자의 정당한 우려를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왕 주임도 전날 안보리 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당사국들이 휴전 추구를 지속하고 서로 양보해 중동에 가능한 한 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세 자 얼음은 하루 추위에 언 것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오래 누적된 문제는 하룻밤 새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중국이 중동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키우는 배경에는 에너지 안보와 글로벌 외교 전략이 동시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 입장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안정이 경제와 직결돼 있다.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물동량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 긴장이 장기화할 경우 중국 역시 유가 급등과 공급 차질 부담을 피하기 어렵다.

중국은 최근 몇 년간 ‘미국은 군사개입, 중국은 중재와 협상’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강화해왔다.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국교 정상화 합의를 중재한 것도 같은 흐름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