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낙원’으로 불리던 이 나라, 버스도 못 타 걸어다닌다고?…이란戰에 몸살 겪는 ‘은둔의 휴양지’

싱가포르·한국 등에서 석유 수입해온 태평양 섬나라
이란 전쟁 이후 급등한 유가에 직격타 “주유비 두배 올라”
에너지 자급률 낮고 식량 수입 의존도 높아
운송비 부담이 물가 상승으로 직결…일상 무너질 정도

지난 2023년 10월 피지 비티 레부 섬의 산호 해안에 위치한 나타돌라 해변의 한 리조트 전경. [게티이미지]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미국·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으로 촉발된 글로벌 석유 공급난으로 태평양 섬나라들의 경제가 전례 없는 타격을 입고 있다. 이미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이 섬들은 석유 위기라는 또 다른 파고를 맞았다.

피지에 거주하는 아그바르 모하마다는 영국 일간 가디언에 평소 40달러면 충분했던 주유 비용이 두 배 이상 치솟았다며 “차량은 거의 없었지만, 연료 가격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올라 있었다”고 전했다.

연료 가격이 오르면서 식료품 가격과 통학 비용도 오르고 있다. 피지에서는 농민들이 농산물을 도시로 운반하는 것조차 비용이 부담될 지경에 이르렀다. 버스업체들도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졌다.

연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차를 이용하는 경우도 대폭 줄었다. 피지의 운전자 제럴드 엘라이사는 “등교, 출근, 귀가 등 꼭 필요한 이동에만 차를 사용한다”며 “아이들은 버스를 타거나 걸어 다니고 있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가디언은 “많은 피지 가정에서 연료는 이제 단순히 자동차를 움직이는 문제가 아니라 삶 자체를 바꾸는 요소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피지 등 태평양 섬나라의 주민들이 최근 버스도 제대로 못 탈 정도로 일상에 타격을 입는 이유는 이란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 에너지 수급난 때문이다. 태평양 섬나라들이 유독 에너지 수급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에너지 수급 구조가 단순하고, 자급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태평양 섬나라들은 싱가포르·말레이시아·한국·중국 등 소수 국가에서 대부분의 원유를 수입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80~90%를 넘는다. 유가가 오르면 물가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다.

많은 태평양 국가는 2030년까지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실제 전환 속도는 매우 더디다.

호주국립대(ANU)의 루바야트 초우두리 박사는 “태평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인구도 적어 국제 공급망 충격에 특히 취약하다”며 “관광·해외송금·원조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에서 유가 상승은 물가뿐 아니라 국민 소득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2019년 10월 솔로몬제도 호니아라 중앙 시장에서 상인들과 쇼핑객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게티이미지]


솔로몬제도는 지난해 전력 생산의 90% 이상을 석유에 의존했다. 태평양 제도의 다른 섬나라들인 나우루와 통가 역시 80% 이상이 석유 기반 전력이었다.

식량의 수입 의존도도 높다. 유엔에 따르면 2021~2023년 기준 식품 수입 의존도는 사모아와 통가에서 전체 순수입의 20%를 넘었고, 키리바시에서는 29% 이상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만큼, 국제유가가 급등하면 식량 등 생필품 가격이 고스란히 상승하는 구조다.

에너지 부족으로 식료품 등 물가가 치솟자, 각국도 대응에 나서고 있다. 피지 의회는 국제 유가 급등으로 인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의원 급여를 20% 삭감하기로 했다. 태평양 제도의 다른 국가들도 연료 가격을 잇달아 인상하는 동시에 기업과 주민 지원책도 마련하고 있다.

이와 관련, 호주 정부는 연료 저장·공급 허브 구축 사업 등 연료 안보 강화를 목적으로 피지에 3000만달러 규모 지원 계획을 발표했다. 피지의 시티베니 라부카 총리는 이에 대해 “추가 연료 가격 인상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급국들이 위기 상황에서 자국 시장을 우선할 경우 작은 섬나라들이 심각한 공급난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제 호주도 말레이시아와 한국이 자국 수급 안정을 위해 수출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를 받은 상태다.

초우두리 박사는 “호주는 LNG 생산국이고 구매력도 강해 상대적으로 대응 여력이 있다”라며 “하지만 솔로몬제도나 미크로네시아 같은 작은 섬나라들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