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람스 교향곡 4번 연주 중
비올라 수석 긴급 악기 교체
오케스트라의 비상 프로토콜
![]() |
| 뮌헨필과 한국을 찾은 라하브 샤니 [빈체로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완벽하게’ 재탄생한 브람스였다. 브람스 특유의 두터운 관현악과 정통 독일 사운드를 품은 뮌헨필을 라하브 샤니는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요리했다.
슈트라우스가 ‘달빛 비치는 언덕 너머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장례 행렬 같다’고 한 2악장은 이날의 백미였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핵심 주제로 포문을 열고, 중반부에 접어들자 비올라가 이 선율을 이어받는다. 비올라의 짙고 어두운 음색이 달빛처럼 가라앉으며 음악이 마무리 되자, 그 순간 무대 위엔 ‘무음의 드라마’가 시작됐다.
2악장 안단테 모데라토가 끝난 직후, 비올라 수석 야노 리스보아(Jano lisboa)가 뒷줄 연주자를 향해 말을 건넸다. 그러더니 이내 가장 뒷줄의 연주자가 전광석화처럼 움직여 그의 악기와 자신의 악기를 바꿨다. 악장이 끝난 뒤의 상황이었기에, 지휘자 라하브 샤니 역시 가만히 지켜보며 상황이 마무리 되기를 기다렸다. 악기를 바꾼 연주자가 무대 한켠 문을 통해 백스테이지로 향하고 난 뒤에야 3악장은 다시 시작됐다.
이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지난 수백 년간 다듬어진 오케스트라의 ‘비상 대응 프로토콜(Emergency Protocol)’이 실시간으로 가동된 순간이었다. 완벽한 선율 뒤에는 늘 전쟁터 같은 위기관리의 세계가 숨어 있다.
브람스 4번 2악장은 비올라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이 악장은 신비로운 프리지아 선율(Phrygian mode)로 시작해 중반부에서 비올라가 이 핵심 주제를 주도적으로 이어받는다.
특히나 이 곡은 비올라 오디션의 단골 발췌곡일 만큼, 주선율을 떠받치는 정확한 음정과 깊은 보잉(bowing)이 요구된다. 비올라는 악장 전반에 걸쳐 박동하는 듯한 셋잇단음표와 분산화음 형태의 반주를 끊임없이 연주해야 한다. 연주자에겐 지속적인 활 쓰기와 정교한 왼손 손가락 움직임을 요구하는 것이다. 곡의 밀도가 높아질수록 악기의 현과 브릿지에 가해지는 물리적 압박이 커진다.
![]() |
| 뮌헨필이 브람스 교향곡 4번 연주 중 비올라 수석 연주자의 악기 문제가 발생하자, 오케스트라의 비상 대응 프로토콜이 작동했다. [빈체로 제공] |
이 곡을 연주할 땐 환경도 악기에 영향을 미친다. 공연장의 강한 조명과 건조한 공기가 악기의 현과 나무 몸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특히 비올라의 주선율 음역대인 A선과 D선에 가해지는 압력은 2악장의 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오히려 날카롭게 날이 선다. 게다가 뮌헨필은 이날의 연주가 한국에선 3번째였고, 같은 곡을 지난 6일 인천아트센터에서 연주했던 터라 악기 역시 적잖은 무리를 버틴 상황이었다.
야노 리스보아는 2악장을 마친 뒤, 악기가 3, 4악장을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브람스 교향곡 4번은 뒤로 갈수록 악기에 가해지는 부담이 커진다. 3악장은 격렬하고 빠른 움직임을 필요로 하며, 4악장은 비극적이고 웅장한 ‘샤콘느’로 오케스트라 전체가 극한의 에너지를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오케스트라의 전통적인 ‘계급적 악기 교환’이 시작된다.
오케스트라에서 악기 문제가 생기면 이른바 ‘톱-다운(Top-Down)’ 방식을 따른다. 핵심은 ‘음악의 연속성’을 위해 리더의 손에는 항상 ‘최상의 악기’가 들려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날 뮌헨 필이 보여준 모습은 교과서였다. 수석의 결함 악기는 섹션의 가장 마지막 줄(last chair)로 보내졌고, 수석은 새 악기를 받아든 뒤, 곧장 3악장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오케스트라 협연 도중 독주자의 악기에 문제가 생길 경우에도 악단은 즉각적인 ‘계급적 악기 교환’ 프로토콜을 가동한다. 독주자가 자신의 기량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 내에서 가장 뛰어난 성능의 악기를 즉시 공급하기 위한 결정이다.
독주자의 현이 끊어지면, 독주자는 연주를 멈추지 않거나 최소한의 중단만을 거친 뒤 악장(Concertmaster)에게 자신의 결함 악기를 건네고 악장의 바이올린을 받는다. 악장은 오케스트라의 리더로서 독주자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의 악기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악장은 독주자의 결함 악기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자신의 바로 옆에 앉은 부악장(Associate/Assistant Concertmaster)의 악기와 교환한다. 이 연쇄 반응은 섹션의 뒤쪽으로 이어지며, 최종적으로 결함이 있는 악기는 섹션의 가장 마지막 줄(last chair) 연주자에게 전달된다.
마지막 줄 연주자는 무대 위에서 조용히 현을 교체하거나, 상황이 여의찮으면 악기를 가지고 무대 뒤로 나가 수리한 뒤 다시 가져온다. 이 모든 과정은 음악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해 숨소리조차 죽인 채 진행된다. 숙련된 연주자들은 30초 이내에 현 교체와 조율을 마치기도 한다. 지난 9일 뮌헨필의 비올라 섹션 마지막 줄 연주자는 곡이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못했다.
![]() |
| 미도리 고토 [마스트미디어 제공] |
사실 오케스트라 공연 중 악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다. 세계 클래식 음악 역사에선 이미 ‘전설’을 쓴 ‘악기 교체’ 사건이 있다. 3대의 바이올린을 쓴 14세 소녀의 이야기다.
때는 1986년 7월, 탱글우드. 일본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미도리 고토(Midori Goto)의 사례다. 당시 미도리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레너드 번스타인의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 때 미도리의 3/4 사이즈 바이올린 E현이 끊어졌다.
미도리는 당황하지 않고 악장에게 다가가 그의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빌렸다. 놀라운 일은 그 뒤에 벌어졌다. 악장의 악기 줄마저 끊어진 것이다. 미도리는 다시 부악장의 과다니니를 건네받아 연주를 마쳤다.
이날의 연주는 “14세 소녀, 3대의 바이올린으로 탱글우드를 정복하다”라는 제목으로 뉴욕타임스 1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악기 결함이 발생했을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얼마나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독주자를 보호하는지 보여주는 최고의 모범 사례로 기록된 것이다.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2021년 시애틀 심포니와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연주 중 바이올린의 E현이 끊어진 것이다. 레이 첸은 현이 끊어지는 소리가 나자마자 악장에게 바이올린을 넘기고 악장의 악기를 받아 연주를 이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레이 첸의 대처 방식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 여분의 E현을 미리 준비했던 것이다. 이에 연주 중 짧은 휴지기에 부악장에게 E현을 전달했다. 부악장은 무대 위에서 레이 첸의 바이올린에 새 현을 끼우고 조율을 마쳤으며, 레이 첸은 악장 사이 시간에 자신의 원래 악기를 돌려받아 연주를 마무리했다. 연주자가 시애틀의 습도, 비행기 이동 시간 동안의 건조함 등 기후 변화로 인해 발생할 비상 상황에 완벽히 대비한 사례다.
현악기는 줄이 끊어져도 다른 악기를 빌리면 되지만, 관악기와 타악기는 상황이 더 복잡하다.
오보에와 클라리넷과 같은 목관악기는 리드(Reed)나 패드(Pad)가 생명이다. 2017년 런던 심포니의 수석 오보이스트는 솔로 직전 리드가 갈라지자 옆자리 단원의 악기를 즉시 받아 연주를 이어갔다. 그 사이 옆 단원은 수석의 악기에 새 리드를 끼워 돌려줬다.
![]() |
| 2023년 2월 세계적인 지휘자 엘리아후 인발과 함께 했던 KBS교형악단의 제787회 정기 연주회에서 이원석 KBS교향악단 수석의 팀파니가 찢어졌다. [KBS교향악단 유뷰트 채널 캡처] |
특히 오보에와 바순 같은 더블 리드 악기 연주자들은 리드의 상태에 극도로 민감하다. 리드는 소리의 근원이지만 기후 변화에 매우 취약해 공연 직전까지 완벽하던 리드가 무대 조명의 열기나 건조한 공기로 인해 갈라질 수 있다.
오보에 연주자들은 이에 무대 위에 ‘리드 케이스’를 지참한다. 최소 3개에서 많게는 10개 이상의 검증된 리드가 들어있어, 리드에 문제가 생기면 연주자는 마디 사이의 짧은 휴지기를 이용해 신속히 리드를 교체한다.
트럼펫이나 호른 등 금관악기는 밸브가 굳어버리면 답도 없다. 이때는 ‘어시스턴트’ 연주자가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수석의 악기가 고장 나거나 입술 근육이 마비되면 어시스턴트가 즉시 그 부분을 이어받는다.
팀파니와 같은 타악기는 혈혈단신 무대에 서기에 자체적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2023년 KBS교향악단의 이원석 팀파니 수석은 연주 중 가죽 헤드가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제787회 정기 연주회. 쇼스타코비치 11번의 연주 도중 벌어진 돌발상황이었다. 교체할 악기가 없었던 터라, 이 수석은 남은 3대의 팀파니만으로 음정을 재배치해 곡을 완주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지휘를 맡았던 세계적인 거장 엘리아후 인발은 공연이 끝나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원석 수석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 사건 이후 이 수석은 국내 악단 최고의 스타가 됐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가 직접 관리하기보다는 공연장 측의 장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피아노 바퀴의 잠금장치가 풀려 연주 중에 피아노가 움직이거나, 서스테인 페달이 고착되어 모든 음이 웅웅거리며 울리는 사고 등이 실제 공연 중에 발생하는 사례는 흔하다.
브라질의 피아니스트 일리안 로드리게스(Eliane Rodrigues)는 연주 중 피아노 페달 결함이 발생하자, 연주를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무대 바닥 아래로 피아노와 함께 내려갔다가 새 피아노를 타고 다시 올라오는 명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 |
| [헤럴드경제DB]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