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분 무반주, 첫 음정 놓치면 끝까지 못 간다”…‘최고 난도’ 폴란드 합창이 온다 [인터뷰]

합창 지휘자 다리우스 짐니츠키 인터뷰
17일 국립합창단 ‘폴란드 합창의 향연’
르네상스부터 현대까지 한 자리서 들어
‘오소서, 창조주여’ 무반주 11분 ‘난곡’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다리우쉬 짐니츠키 지휘자는 “한식도 너무 맛있어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국립합창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30페이지 악보 중 첫 페이지에서 음정을 잃으면 끝까지 갈 수 없어요.”

장장 11분, 무반주 합창곡 ‘베니 크레아토르(오소서, 창조주여)’는 국내 최정상 합창단에게도 ‘최고난도의 곡’이었다. 라틴어, 폴란드어로 써진 이 곡은 폴란드 출신 ‘최초의 교황’인 바오로 2세가 모국에서 한 역사적 연설에서 영감을 받아 워카셰프스키가 작곡한 곡이다. 라틴어 원문과 교황의 폴란드어 말씀이 인용됐다.

폴란드 출신으로 한국을 처음으로 찾은 지휘자 다리우쉬 짐니츠키는 국립합창단과 함께 지금 하염없이 이어지는 큰 산을 넘고 있다. 이미 여섯 번의 리허설을 마친 짐니츠키 지휘자는 “공연에서 연주할 10곡 중 가장 어려운 곡”이라고 단언했다. 한 번 발을 잘못 디디면 앞으로의 11분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인 곡이다.

낯설지만 숭고한 울림이 찾아온다. 국립합창단과 폴란드 프레데리크 쇼팽 국립음악대학 교수이자 유럽 합창을 이끄는 다리우쉬 짐니츠키 지휘자의 만남. 오는 17일 관객과 만날 ‘폴란드 합창 음악의 향연’은 역사의 고난을 뚫고 피어난 순수한 위로이자, 폴란드 합창의 정수를 만날 기회다.

“단 한 번도 없었다”, 최초 또 최초의 무대


이번 공연은 여러모로 ‘최초’의 의미가 더해졌다.

국립합창단 창단 이래 ‘처음’으로 선보이는 ‘폴란드 합창곡’ 레퍼토리라는 점, 10곡 중 8곡이 오직 목소리로만 음악을 들려줄 ‘아카펠라’라는 점이다. 국립합창단의 공연은 보통 피아노나 오케스트라와 함께 웅장한 아름다움을 들려주나 텅 비워진 콘서트홀에서 ‘목소리’라는 악기만으로 프로그램의 상당수를 구성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고 한다.

짐니츠키 지휘자가 한국을 마음에 품은 것은 3년 전이었다. 국립합창단과의 인연이 2023년 미국합창지휘자협회(ACDA) 컨퍼런스에서 시작되면서다. 그는 “당시 국립합창단의 ‘새야새야’, ‘어기영차’를 듣고 이 합창단과 꼭 작업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유럽 합창단들과는 완전히 다른 색깔이었어요. 단원들이 자기 일에 정말 헌신적이었고, 무엇보다 한국 고유의 음악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이 특별했죠.”

공연에선 폴란드 합창의 정수가 70분간 그려진다.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짐니츠키 지휘자는 폴란드 합창 음악의 방대한 스펙트럼을 한 무대에서 조망한다.

국립합창단 ‘폴란드 합창의 향연’ [국립합창단 제공]


그는 폴란드 합창 음악의 가장 큰 특징으로 ‘종교적 텍스트를 넘어선 인간 존재에 대한 위로’를 꼽았다. 폴란드는 역사적 굴곡이 많은 나라다. 아우슈비츠와 같은 20세기 인류 최대의 비극을 겪었고, 냉전 시대 공산주의도 관통했다.

그는 특히 “폴란드 합창은 과거 거장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아방가르드한 실험과 현대적 상상력을 결합해 독자적인 색채를 구축해 왔다”고 설명했다.

그에게 합창은 전례를 넘어 고난 속에서 삶의 이유를 찾고 아픔을 보듬는 매체였다. 이번 프로그램 역시 역사적 흐름을 반영해 르네상스의 정교한 폴리포니부터 현대의 다층적 화성까지 ‘음악적 드라마’로 엮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첫 곡과 마지막 곡이 모두 ‘하느님께 환호하라(Jubilate Deo)’라는 점이다. 20세기 작곡가 슈비데르의 곡으로 시작해, 21세기 작곡가 코발스키의 같은 제목 곡으로 끝난다. 짐니츠키 지휘자는 “같은 텍스트지만 완전히 다른 음악”이라고 했다.

“슈비데르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차분하게 시작하지만, 코발스키는 트럼펫과 타악기까지 동원해 ppp(매우 여리게)에서 fff(매우 세게)까지 극단적인 다이내믹을 오갑니다. 요즘 거리에서 들을 수 있는 리듬이죠.”

프로그램에는 짐니츠키의 자작곡인 ‘찬미받으소서(Benedictus Dominus)’와 ‘오 십자가여(O crux ave)’도 한국 초연된다. ‘찬미받으소서’는 팬데믹 시기에 작곡된 곡으로, 단순한 주제가 점차 풍부한 폴리포니로 확장되며 찬미의 정서를 밝게 펼쳐낸다. ‘오 십자가여’는 화려함보다는 절제된 어법 속에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11분간 반주 없이…“6분만 넘어도 위험”


폴란드 합창 음악의 난이도는 상상 그 이상이다. 특히 파베우 우카셰프스키(1968~)의 ‘오소서, 창조주여’는 난곡 중의 난곡이다. 이 곡 역시 반주라곤 단 한 음도 없다.

짐니츠키 지휘자는 “무반주곡은 5~6분만 넘어가도 위험한데, 이 곡은 11분”이라며 “반주가 있으면 음정을 잃어도 다시 찾을 수 있지만 아카펠라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야 하는 곡”이라고 강조한다.

음악 형식에서도 복잡다단하다. 이중 합창 형식의 곡으로, 8개 성부가 두 개의 합창단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화성을 만들어낸다. 불협화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갑자기 완전히 다른 화성으로 도약하고, 박자는 엇박자로 끊임없이 어긋난다.

“페이지마다 ‘북극성’ 같은 중심 음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음만 정확하게 잡고 있으면 길을 잃지 않죠.”

폴란드 합창 지휘자 다리우쉬 짐니츠키 [국립합창단 제공]


프로그램의 대다수를 아카펠라로 구성한 것은 지휘자가 생각하는 ‘합창의 정수와 미학’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는 “폴란드는 콘서트홀보다 교회에서 공연하는 경우가 많아 자연스럽게 악기 없이 순수한 목소리만으로 표현하는 전통이 발달했다”며 “악기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목소리는 어떤 것에도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아카펠라야말로 합창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짐니츠키 지휘자는 일찌감치 내한, 국립합창단과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리허설을 이어가고 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이 보통 3~4회 리허설로 공연을 준비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는 “합창은 훨씬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며 “특히 생소한 곡이고, 처음 호흡을 맞추는 지휘자라면 더욱 그렇다”고 했다.

짐니츠키 지휘자가 리허설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듣는 것’이다. 리허설에서 그의 지휘는 흥미롭다. 지휘자의 손은 생각보다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휘자의 손동작은 전체 작업의 20%에 불과해요. 나머지 80%는 듣는 것이죠.”

그는 리허설을 ‘파티가 끝난 뒤의 방 청소’에 비유했다. 짐니츠키 지휘자는 “젊은 지휘자들은 쓰레기를 치우기도 전에 창문부터 닦으려 한다”며 “하지만 큰 문제부터 해결해야 작은 부분은 저절로 정리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효율성이 핵심이다. “처음 들어보고 현재 위치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목표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죠. 중요한 건 모든 부분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개선이 필요한 부분만 집중하는 겁니다.”

국립합창단과의 만남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는 “정말 헌신적이고 집중력이 뛰어나다”며 “해석에 열려 있고 유연하게 반응하는 것은 물론 전문적인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공연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띠며 ‘동일한 텍스트’를 각기 다른 시대의 합창음악으로 변주해 관객을 배웅한다. 위로와 성찰의 시간을 걸어 축제를 마무리하며 공연장을 떠나도록 하는 구성이다. 한국 관객들이 이번 공연을 통해 “노래하는 순간 우리가 타고난 감수성과 만나는 경험”을 하길 바란다고 했다. 역사의 아픔을 음악적 드라마로 만나는 시간이다.

“합창은 타인의 호흡을 듣고 맞추는 예술이자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에요. 함께한다는 느낌, 그 안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회를 만드는 게 진짜 목표죠.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마음속에 장엄하지만 절제된 폴란드의 숨결이 닿아 다시 삶을 살아낼 용기가 되길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