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 “헤지 약화·비용 절감 동시에”
주유소 “불확실성 해소 vs 리스크↑”
중동 사태에 따른 국제유가 급등으로 주유소 ‘사후정산제’ 개편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업계 관행이 폐지 수순에 들어가면서 정유사와 주유소 간 이해관계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가격 왜곡 논란이 제도 손질의 계기가 됐지만, 실제 파급효과는 정유사보다 주유소에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7일 업계에 따르면 오는 8일 중동전쟁 경제 대응 특별위원회 3차 회의에서 사후정산제 개편 방향이 보다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일 2차 회의에서 당정이 사후정산제의 원칙적 폐지에 뜻을 모은 데 이어 세부적 내용이 정리될 것이란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사후정산제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되 영세 주유소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가격 깜깜이 논란에…관행에서 개편 대상으로=사후정산제는 정유사가 주유소에 석유 제품을 공급할 때 확정 가격을 제시하지 않고,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시장 상황을 반영해 최종 공급가를 정산하는 업계 관행이다. 통상 월평균가나 월말가 기준으로 정산이 이뤄진다. 최근 국제 유가 급등 국면에서 국내 주유소 기름값이 치솟자 해당 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주유소들이 정확한 매입 단가를 모른 채 판매 가격을 책정하는 구조가 가격 인상을 앞당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주유소 업계는 사후정산 구조에서 정유사가 통보한 가격을 기준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어 가격 불확실성과 금융 부담이 누적돼 왔다고 주장한다. 한 관계자는 “사후정산 구조에서는 공급가격이 사후에 확정되다 보니 실제로는 높은 가격에 먼저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 금융비용 부담이 누적돼 왔다”며 “가격을 조기에 확정하고 정유사 간 공급가 비교가 가능해지면 소비자 가격 안정에도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사후정산제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제도는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2008년 사후정산 관행이 거래 불투명성과 주유소 불이익 소지가 있다며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2013년 “사후정산제로 인해 주유소가 실질적 불이익을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이를 불공정거래로 볼 수 어렵다고 판단했다. 사후 가격 조정을 통해 오히려 주유소의 구매 비용이 낮아질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된 것으로, 사후정산이 일종의 ‘사후 할인’ 성격을 갖는 만큼 주유소에 실질적 불이익으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정유사 “헤지 약화 우려…비용 절감 효과도”=그럼에도 최근 국제유가 급등 국면에서 가격 왜곡 논란이 불거지며 정책 방향이 전환되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해 정유업계에서는 복합적 영향을 예상하고 있다. 우선 사후정산이 폐지되면 유가 변동에 대한 ‘헤지(위험 회피)’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 부담 요인으로 꼽힌다. 기존에는 일정 기간 이후 가격을 보정할 수 있었지만, 제도가 폐지되면 공급 시점 가격이 그대로 확정되면서 유가 등락이 실적에 직접 반영될 가능성이 있다. 한 정유사 관계자는 “사후정산 시스템이 오래된 만큼 제도 변경 이후 시장 반응은 실제 시행을 해봐야 알 수 있다”며 “사전 확정가 체계로 전환될 경우 영향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비용 측면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도 거론된다. 사후정산이 사실상 사후 할인, 즉 마케팅 비용 성격을 띠고 있는 만큼 제도 축소 시 비용 절감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사후정산은 거래 유지 차원의 할인 기능을 해온 측면이 있다”며 “제도가 축소되면 관련 비용이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정산이나 가격 협상 과정이 줄어들어 관리 측면에서는 오히려 단순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주유소 부담 확대 우려…시장 변동성 직접 노출=제도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은 주유소 업계에 더 크게 미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후정산제는 그동안 월평균가나 주간 평균가 등을 통해 유가 변동에 따른 손익을 완충하는 역할을 해왔는데, 제도가 폐지되면 이런 기능이 약해져서다. 특히 자금력과 저장시설이 부족한 소규모 주유소의 부담이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상당하다. 유가 상승기에는 고가에 반복 구매해야 하는 반면, 자금력이 있는 사업자는 선제적으로 물량을 확보해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매입 주기가 길거나 재고 관리 여력이 부족한 주유소일수록 가격 변동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는 사후정산 방식을 필요로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후정산제 폐지 시 대리점 유통 구조로 인한 가격 왜곡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정유사와 주유소 사이에 위치한 일부 대리점이 보유 재고를 활용해 시세보다 낮거나 높은 가격으로 물량을 공급할 경우, 특정 주유소를 중심으로 가격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복잡한 상황이 예상되면서 업계에서는 사후정산제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되, 일부 주유소에 한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특히 소규모·저빈도 구매 주유소를 중심으로 사후정산 유지 수요가 존재하는 만큼, 선택형 제도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초 폐지 요구가 강하게 나오다가 실제 현장에서 제도 유지 필요성을 언급하는 목소리가 늘자 선택지를 열어두는 방향으로 흐르는 기류”라며 “사후정산이 주유소에 불리한 제도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구매 비용을 낮추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은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