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보다 강한 ‘사나에노믹스’…엔저·금리상승에 韓 영향권

日 ‘적극 재정’…122조엔 사상 최대 예산
AI·첨단 반도체 분야만 1.2조엔 투자 가속
국채 발행 확대에 일본 장기금리 급상승
식품소비세 감세 공약…재정악화 우려도
환율·자금이동…원화·韓 수출경쟁력 변수


지난 8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 자민당이 단독으로 316석을 확보하며 대승을 거두자 9일 도쿄 주식시장에서 닛케이 평균지수가 장중 사상 처음으로 5만7000선을 넘어섰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조기 총선 승리를 발판으로 전면적인 확장재정에 시동을 걸면서, 일본 경제 정책의 방향 전환이 금융시장 전반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아베노믹스를 넘어서는 수준의 적극 재정 기조가 엔화 약세와 국채 금리 상승을 동시에 자극할 경우, 환율과 자본 이동, 수출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에도 파장이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강한 경제, 책임 있는 적극 재정’을 내걸고 역대 최대 규모의 예산을 편성했다. 올해 일본 일반회계 예산은 약 122조엔으로 전후 최대치다. 조기 총선 승리로 국회 통과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재정 집행은 한층 속도를 낼 전망이다. 부족한 재원은 국채 발행으로 충당할 계획으로, 신규 국채 발행 규모는 약 29조엔에 달한다.

정책의 핵심은 국가 주도의 전략산업 직접 투자다. 다카이치 정부는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방위·조선, 바이오 등 17개 분야를 국가 성장축으로 설정하고 집중 지원에 나섰다. 특히 AI와 첨단 반도체 분야에만 약 1조2000억엔을 투입하기로 했다. 금융 완화와 민간 소비 유도에 방점을 찍었던 아베노믹스와 달리, 정부가 성장 방향을 직접 설계하겠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로 꼽힌다.

정책 전환에 대한 기대는 우선 주식시장에서 빠르게 반영됐다. 닛케이225지수는 9일 오전 9시22분 현재 57317.39로 장중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전 거래일 대비 5% 넘게 뛰었다. 총선 이후 확장재정과 전략산업 투자 확대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위험자산 선호를 자극하며 지수를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다카이치 총리의 정책 노선을 선반영한 이른바 ‘다카이치 트레이드’가 나타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주식시장이 환호하는 것과 달리 채권시장은 빠르게 긴장하고 있다. 일본의 국가부채 비율은 이미 국내총생산 대비 236%로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높다. 여기에 대규모 국채 발행 계획이 더해지면서 장기 국채 금리는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일본 4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최근 4%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10년물 금리 역시 수십 년 만의 고점권에서 움직이고 있다.

국채 발행에는 다카이치 내각이 추진하는 식품 소비세 감세 여부도 관건이다. 자민당은 식품을 2년간 소비세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에 대한 검토를 향후 가속한다는 내용을 총선 공약에 담았다. 문제는 현재 8%인 식품 소비세를 걷지 않으면 한 해에 약 5조엔(약 46조6000억원)의 재원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소비세는 사회보장 재원으로 활용되고 있어서 이를 대체할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적자 국채를 발행할 수밖에 없고, 이는 재정 악화로 이어질 우려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일각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식품 소비세 감세 기간을 2년으로 한정했지만, 2028년 참의원(상원) 선거 등을 고려하면 향후 식품 소비세를 원래대로 올리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확장재정의 ‘사나에노믹스’는 한국 금융시장에도 부담 요인이다. 일본 국채 금리가 오를 경우 글로벌 채권 투자자들의 자금 일부가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장기 자금을 운용하는 일본 기관투자가들의 국내 채권 비중 축소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본 금리 상승은 한국 국채 금리에도 상방 압력을 줄 수 있다.


환율 측면의 파장도 무시하기 어렵다. 다카이치 정부는 엔화 약세를 용인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날 도쿄 외환시장 개장 전 엔· 달러 환율은 157엔대 중후반까지 상승하며 엔화 약세 흐름을 보였다. 엔저 기조가 이어질 경우 원화 역시 동조 약세 압력을 받을 수 있고, 단기적으로는 일본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한국 기업의 수출 여건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일본은행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도 변수다. 일본은행은 마이너스 금리를 종료한 데 이어 기준금리를 0.75%까지 끌어올렸다. 시장에서는 상반기 중 추가 인상 가능성도 점치고 있다. 금리 정상화가 본격화될 경우 글로벌 자금의 방향이 다시 일본으로 향하면서 한국 증시와 채권시장에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치 일정이 재정 확대 압력을 키우는 구조도 변수다. 고노 류타로 BNP파리바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여당이 승리하면 확장적 재정 정책이 국민에게 지지됐다는 해석이 강해져, 여당 내 리플레파(인플레이션 정책 지지하는 부류)와 다카이치 총리 측 경제 자문진이 경기 과열을 감수하더라도 성장을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설령 자민당이 고전하더라도 중·참의원 모두 소수 여당 구도가 되면 야당이 자체 공약 실현을 위해 세출 확대를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2%를 웃도는 물가 상승이 정착한 2022년 4월 이후 실질임금이 플러스를 기록한 달은 44개월 중 4개월에 그쳤다. 2024년 중의원 선거와 2025년 참의원 선거 등 국정 선거가 잦아지면서 단기 표심을 의식한 재정 확대 요구는 피하기 어려운 흐름이 됐다. 정치가 재정의 가속 페달을 밟고 시장이 브레이크를 맡는 구도가 굳어질 경우, 시장의 경고 신호가 선거를 통한 민주적 정당성에 가로막히면서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닛케이는 “다카이치 총리는 긴축재정에서 적극재정으로 전환해 AI, 반도체, 바이오 등 17개 분야에 대한 전략 투자로 성장할 힘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며 “관 주도의 성장 투자가 원하는 대로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팽창한 재정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잃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