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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찬 전 총리[연합] |
[헤럴드경제=김성훈·박연수 기자] 이해찬 전 국무총리(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가 별세했다. 향년 73세.
이 전 총리는 민주평통 회의 참석을 위해 베트남 호찌민 출장 중이던 지난 23일 쓰러져 심폐소생술을 받으며 응급실로 이송됐다. 이후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현지 의료진의 수술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이날 오후 2시48분께 사망했다.
민주평통은 현재 유가족이 관계기관과 함께 국내 운구 및 장례 절차를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7선 의원 출신인 이 전 총리는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이재명 대통령 당선을 이끈 ‘킹메이커’이자,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 문재인 정부 민주당 대표를 지낸 민주진영 원로 정치인으로 평가된다.
이 수석부의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와 함께했다. 1974년 유신체제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가량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육군교도소 수감 중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등 지도자들과 만나며 민주화 의지를 다졌다. 2년 뒤인 1982년 성탄절 특사로 석방된 후 재야 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이 수석부의장의 정치 여정 2막이 시작됐다. 6월 항쟁을 주도했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끌어내면서다. 당해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후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국회 입성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이뤄졌다.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이후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서 제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에 성공했다.
노동권 확대에도 관심이 깊었다. 노동 분야 입법 활동에도 주력하며 노무현 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렸다.
1995년 민선 1기 서울시에서 정무부시장을 맡았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일선 고교의 야간 자율학습을 폐지하며 ‘이해찬 세대’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다만 고교 평준화 확대 등 학교 교육 정상화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16대 대선이 치러진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기획본부장을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을 도왔다. 2003년 국민참여통합신당 창당 기획단장을 맡아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총리로 임명됐다.
그는 노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는 ‘실세 총리’로서 국정 전반을 이끌었다. 이 수석부의장이 노 전 대통령보다 6살이나 아래임에도 회의실에서 ‘맞담배’를 피웠다는 일화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총리 재임 당시 행정수도 이전을 주도하고, 이라크 파병 등을 둘러싼 갈등으로 흔들리던 당·정·청 관계를 복원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2006년 3월 이른바 ‘3·1절 골프’ 논란이 불거지며 거센 사퇴 압박을 받았고,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07년 17대 대선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후 민주통합당 대표를 지냈으나 대선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물러났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세종시에 당선됐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공천 배제 이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복당했으며, 2018년 문재인 정부 시기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선출됐다. 21대 총선 때 시스템 공천 등을 통해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이 수석부의장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 그것을 기반으로 2022년 대선에서 재집권함으로써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는 100년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대표 임기가 끝난 뒤 2020년 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2024년 22대 총선에서는 당시 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 김부겸 전 총리와 함께 상임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총선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해 10월 제22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임명돼 이재명 정부의 대북·통일 정책 입안을 뒷받침해 왔다.

